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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나몽 Feb 15. 2016

그때의 밸런타인

다른 날의 같은 오늘. 우연히.

차가운 공기가 손을 어루만지는 고즈넉한 주일 아침.

오랜만에 한인교회 예배에 가려고 어학을 했었던 도시를 방문했다

아침 기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면, 찬양팀 연습 시간까지 2시간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한국에서의 습관처럼 그렇게 남는 시간에 매번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사실 앞 뒤, 옆사람 이야기를 엿들을 때가 더 많다 하하) 커피를 마시며 

멍을 때리다가 낙서와 스케치, 안 풀리는 작업의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밀렸던 스케줄 정리나 주중 있었던 일등을 떠올리며 수첩에 끄적이기도 한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젊은 한량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 그래도 동양인이 별로 없는 지역에서 동양 여자 혼자 한자리 버젓이  차고앉아있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구경하는 것보다 많은 시선을 받는다. 이건 뭐 여전히 불편하지만 익숙하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여느 때처럼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예배시간을 기다리며  이것저것 생각하며 끄적거리고 있는데, 

오늘따라 입구부터 카운터 안쪽 구석자리 까지, 곳곳마다 장식되어있는 빨간 장미꽃들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매번 오던 곳이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는 여전히 익숙했지만 그 꽃들 때문에

 '아 이번에 봄맞이 특별 데코레이션을 했나 보다' 싶었다.

그러고 시선을 돌리니 오늘따라 앙증맞은 꽃다발과 곱게 포장된 선물상자 따위를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뭐지? 오늘 무슨 날인가?.'

그래서 지나가던 종업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오늘 무슨 날인가요? 장미도 있고, 커플도 많고..'하고 물었다

종업원은 이 젊은 아가씨가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라고 말하며 

장미꽃 한 송이를 줄까 묻길래 괜찮다고 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나만 혼자'앉아있었다 

저어기 구석에 혼자 커피를 마시던 할아버지 한분 외에는.


그리고 생각났다.

4년 전 오늘.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만나던 사람과 함께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었다

유럽의 대부분의 잘 나가는(?) 식당들은 특별한 날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저녁식사 자리가 없어 식당을 찾아  헤매야한다. 프랑스에 온지 아직 일 년이 안됐던 우린, 값에 비등한 맛집을 알아보고 같이 예약을 했다. 우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식당에 들어와 어설픈 프랑스어로 

밸런타인 스페셜 세트메뉴를 주문했었다. 

먹기도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장식된 음식들이 차례로 등장했고 ,

마지막으로 커피와 함께 핑크와 화이트 초콜릿이 씌워진 하트 모양 디저트가 

예쁘게 묶인 빨간 장미꽃 한 송이와 같이 나왔다.

밸런타인데이 디저트



조금  미화시키자면 

우리는 줄줄이 나오는 음식들을 차례로 아주 맛있게 눈과 입으로 먹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않은 우리는 어설프게 초콜릿을 교환했고,

동시에 우린 그 초콜릿 포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많고 많은 초콜릿 상점들 중에 우리 두 사람 다 똑같은 상점에서, 

비슷한 초콜릿을 고르고, 똑같은 포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우린 아주 많은 것이 달랐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다름이 싫지 않았다.

취미, 취향, 성격, 말투, 인상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너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이해됐고, 이해되었다.

(물론 나보다 상대방이 더 많이 참아준걸 알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괜찮은 남자가 있을까. 할 정도로.


참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듬직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내 흔들리는 유학생활에 버팀목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마지막은 역시 나 때문이었다. 변덕스럽고 소란스럽고 왈가닥 같은 내가 

방학 동안 잠시 일하러 간 그 시간을 못 참고 자유를 요구했었다.

그는 지칠 때까지 나를 붙잡았었고, 나는 외면했었다.

그리고 우린 끝이 났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우리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다.








두서없지만 이 이야기를 적고 있자니 

다음에 시간이 날 때 이 사람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4년이 흐른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그때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난다

동시에 마음 한편이 잠깐 아릿하다



그냥 오늘 모두 행복하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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