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이야기
지리산 어느 자락 끝. 팔순의 노부모님을 몇 번 뵌다. 일 년의 시간은 길고, 마음은 항상 그 곁인데도
내 발은 지리산에서 항상 멀다.
김장철. 다시 뵌 두 분의 삶은 여전히 감사로 충만하다. 곁에 두신 그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을 듯 한데 그것은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의 기준이다. 낡고 좁고 허름한 화장실조차 당신들은 불평의 대상이 아닌 듯 하다. 매번 죄스럽다. 내 삶 꾸리기 바쁘다는 핑계로 수 십 년을 그대로 두었다. 추석 때 당신들의 결심으로 도배를 다시 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그 동안의 방치와 죄스러움으로 가구를 바꾸고, 뭔가를 다시 했다.
추석을 보내고 김장으로 다시 찾았다. 뭘 그리 큰 일 했다고 이것저것 새롭게 자리한 것들을 확인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실상 가구 몇 개로 바뀔 집이 아니다. 오랜 집이다. 그래도, 그 것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인 듯 하다.
아버지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새로 들어온 식탁이 어떻고, 지금 교체하고 있는 가스보일러가 어떻고. 그렇게 수 십 분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의 얼굴을 마음에 담았다. 40 여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 중 이제 남은 친구는 반도 안된다며 '내가 제일 건강하다'고 자랑하신다.
'오늘은 운동 못가겠네..' 보일러 교체작업이 길어지면서 '오후에 같이 운동가자'던 아버지의 마음이 못내 아쉬우신 듯 하다. 모자로 가려진, 안경으로 가려진 눈은 여전히 생각이 많으시다. 내 나이가 이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이럴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가스보일러 교체해준다는 정부지원 소식에 바닥난 기름을 채우지 않고 히터로 지내다 결국 감기가 걸리셨단다. '왜 독촉 전화를 안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도 순서가 있을텐데 기다려야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충분히 그럴 분들이다. '팔순 노부부가 감기가 어떻고, 김장으로 가족이 모이는데 갓난 아기가 어떻고..' 담당에게 있는 말 없는 말로 결국 당일 보일러를 교체 했다.
본가에 내려올 때면 '아버지랑 같이 있으라'는 아내가 지혜롭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내 덕분에 매번 얼굴 마주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생각나는 대로 뭐든 묻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마음에 담는다. 어느 날, 아내에게 크게 감사하게 될 것 같다.
남 피해 주지 않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당신들의 삶에 집중하신 부모님이 내 삶의 표본이고, 지향점이다. 마지막까지, 삶에 겸손한 그런 자세로 살고 싶다. 어떻게든 드러나야 하고, 그래야 살아지는 세대. 그 속에서 나도 살아야 하니 '스스로 겸손'은 사실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지리산 자락 끝에서 평생을 감사로 채우시는 모습이 갈수록 크게 느껴진다.
다음 귀향은 설 명절이다.
건강하게, 겨울 잘 지내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