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자신과 화해를 시도하다
얼마전 엄마를 모시고 양양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로 여행을 일체중단했다가 떠난 여행인지라 우리가족 모두 들떠 있었다. 여행은 언제나 좋았지만 문제는 늘 회였다. 회를 떴으니 소주도 한잔 곁들여야하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뒤따랐다. 이렇게 시작된 술판은 되풀이되는 이야기로 끝날줄을 몰랐다. 사실 엄마의 이런 지겨운 주사에 질러 나는 술을 안 마신다. 다행히 속넓은 신랑은 봄날이면 흘러나오는'벚꽃엔딩'처럼 무한반복되는 엄마의 주사를 묵묵히 들어주고 적절히 맞장구도 쳐준다. 이 날은 마침 화이트와인이 있길래 나도 몇모금 마셨다. 공황이 시작된 이후로 술 한잔 기분에 마셨다가 밤새 잠을 못자고 뒤척였던 기억이 있었지만 도수가 얕은 화이트와인 몇모금인지라 큰 문제가 없었다.
엄마는 "네가 뭐가 부족해서 공황이 오느냐, 정신이 약해빠져서 오는것이지."라면서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최서방이 속을 썩이는거 아니냐? 혹시 바람을 피웠는데 나한테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또 엄한 사람을 잡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의 공황의 역사는 깊고도 깊다. 다만 발작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몰랐을뿐. 나는 불안장애를 항상 갖고 살고 있었다. 그 근원에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사랑하는 아빠의 부재가 제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것은, 그 이후로 엄마의 절대적인 권력하에 복종해야했던 나의 유년, 엄마의 새 남자친구들과 그의 자식들에 둘러싸여 보냈던 청소년기였다. 그리고 50이 다되어가는 지금의 나를 그때의 딸로 놓고 자꾸 일상을 간섭하려하는 엄마의 태도가 제일 힘들다는것, 여러번 화내고 애원해도 절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엄마는 분명 나의 결혼생활에 결함이 있을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
엄마의 재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상대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능력하지 않으면 허세가 있고, 지병이 있는 경우도 있고, 자식이 딸린 경우도 있었다. 첫번째 남자는 사업을 한답시고 돈을 뜯어가고 성병을 옮겨주었다. 두번째 남자는 별거중이라는 부인과 끝내 헤어지지 않고 엄마의 돈을 노렸다. 세번째 남자는 아들 셋 딸린 홀아비였는데 당뇨가 심해 직장이 없어 집에서 삽화를 그리며 지냈다. 연민으로 시작된 사랑은 결국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곤했다. 가정폭력에 경중이 있을리 없지만 차라리 친아빠가 때리는거였다면 덜 슬펐을듯 싶다. 오다가다 만난 사이에 정때문에 헤어지지도 못 하고 두들겨 맞는 엄마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 예민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의붓형제 세명과 함께 지냈어야했는데 나는 끝내 그들과 섞이지 않았고 끝내 새아빠라고 불러 본적도 없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되어 새로 데려온 남자친구에게 아빠라고 불러라 한 뒤 일년을 못 넘기고 헤어지는걸 보고 그 뒤로 어떤 남자에게도 아빠라는 호칭을 내어주지 않았다. 엄마의 남자관계는 그렇게 구질구질한 결말로 끝이 나곤했다.
내 공황의 근원은 사실 '엄마' 당신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남편때문이라고 걸고 넘어지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엄마, 사실 최서방이 바람을 피웠어. 엄마한테 말 못했어."라고 말하니 눈을 번뜩이면서 정말이냐고! 마치 기다리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는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어. 어쩐지. 그럼 그렇지. 옳다구나 하는 신바람의 기운마저 들어있었다.
"엄마, 엄마가 듣고 싶은 말이 그거지? 남편이 바람피워서 내가 병이 났으면 좋겠지? 엄마는 내가 불행하게 살았으면 좋겠지?" 하니 엄마는 그건 아니라고 했다. 자식의 불행앞에서 무엇이라도 원인을 알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부모인 내가 모를리 없다. 그 불행의 화살이 사실은 부모인 나를 향해있다면 그것처럼 억울하고 받아들일수 없는 일도 없을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엄마, 엄마는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해본적이 없으니 남자는 다 바람 피우는 줄 아는데. 다 그런건 아니야. 엄마가 그런 이상한 놈들만 골라서 만난거지.내가 왜결혼을 늦게했게? 엄마가 그런 이상한 놈들만 만나서 사는걸 보니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
"너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런 말을 지금 하고 싶으냐? 너는 어디 얼마나 끝까지 잘 사는가보자."
그 말을 할때 엄마는 사랑에 실패한 한 여자였다. 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한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그토록 원하는 조강지처가 되어보지도 못한 채 70을 바라보는 그저 한 여자였다.
나라면 저런 이상한 놈들과 엮이지 않을텐데. 나라면 저런 놈들에게 맞고 살지 않을텐데. 나라면 저렇게 남의 약점을 잡아 쥐면서까지 곁에 두려고하지 않을텐데. 엄마의 실패한 결혼을 보면서 엄마를 패고 떠나는 그들보다 엄마가 더 한심스러웠고 이해할수 없었다. 경멸스러웠다.
그들과 어울리다가 금세 싫증을 내고 적응을 못하던 엄마는 곧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서 집밖으로 나돌았다.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 나는 의붓형제 세명과 새아빠도 아닌 애매한 남자 한명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몇박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전화 한 통화 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방문 꼭 잠그고 자라."를 잊지않았다.
엄마는 내 불안했던 청소년시절의 고통을 알까.
"할머니가 있으니까 그렇게했지. 그래서. 무슨 성폭력이라도 당했다는 소리야? 무슨 일이 있었어?말해봐라."
다행히 아무일도 없었다. 그런 위협을 느껴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가족구성원과 오롯이 내 방 한칸만이 나를 지탱해주던 그 이상한 유년과 청년시절은 불안정하게 뻥 뚫려있는 기분이다. 내 마음이 엄마를 필요로할때, 엄마는 집에 없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엄마의 옷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바람처럼 신나게 살아놓고 이제와서 마치 온 청춘을 나를 위해 바친것처럼 얘기하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렇게 대단한 엄마시니 더욱 잘 모셔라 부담까지 지어주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더구나 너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랐는데 갑자기 공황이 왔다니 놀랍다라고 생각하는것부터 억울하지 않은가.
엄마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너는 얼마나 자식을 잘 기르나 두고보자 하셨다. 네 자식은 네가 최고의 부모라고 할줄 아느냐? 악담과 저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순간. 엄마의 표정에 드리워진 무력감과 허탈함을 보는 순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엄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쇼파에서 내려 앉아 엄마를 살포시 안아드렸다. 엄마역시 한번도 제대로 된 위로도 애도도 받아본적이 없으리라. 엄마가 최선을 다해 삶에서 도망쳐 살았음을 나는 안다. 그리고 자식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안다. 그 것을 인정하라, 사과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엄마를 부정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엄마는 불타오르다가 화르르 무너지는 장작더미처럼 한순간에 울음을 터트리면서 나의 팔을 붙들고 말씀하셨다.
"제발 죽지 마라. 너가 죽을까봐 나는 너무 겁난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 나는 안 죽어. 내가 죽을꺼면 치료는 왜 받고 한약은 왜 먹고 하루에 만보씩은 왜 걷게. 나는 끝까지 살아낼꺼야. 난 이 병을 이길수 있어. 난 죽고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 그냥 불안할뿐이지 자살까지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어. "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누구의 사과도 없고 용서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 한번은 세상밖으로 나왔어야할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 억울함을 해결해주지 않아요.
사과조차 안하는 걸요.
결국은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합니다.
당신에게 부모와 상처에 대해 대화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당신의 말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든 안하든,
한 번쯤 속마음을 표현한다는
그 자체가 당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 떄문입니다.
<오은영의 '화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