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늘도 카페를 가는가
멋지게 꾸민 서재나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집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플랜테리어가 잘된 베란다는 부러움 그 자체다. 기꺼이 자신의 집을 열어젖혀 구경시켜주겠다는 재주꾼들이 모인 곳, <오늘의 집> 앱을 켜고 눈호강을 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제일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카페처럼 꾸몄어요’하는 홈카페 인테리어다. 카페처럼 bar를 꾸미고 멋진 캘러그라피로 홈 메뉴판이나 카페 이름을 지어 걸고 가랜드를 설치하거나 벤치 등을 놓아 정말 카페처럼 꾸미는 것이 한때 유행이었다.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일반인들에 고가의 그라인더, 에스프레소 기계를 갖춘 집들도 많다. 결혼선물로 네스프레소 기계를 받았을 때 우리 집에서 제일 럭셔리한 물건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던 것을 떠올리면 커피가 가정으로 파고든 속도는 놀랍다.
집을 홈카페처럼 꾸밀 정도로 감각 있는 사람들은 요리 솜씨 또한 좋아 라테아트를 그리거나 직접 담근 청으로 멋진 에이드를 만들어 실제 카페 같다. 그런 집에 초대받는다면 나라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여자들에게는 자기 카페에 대한 로망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커피를 내리고 단골손님과 눈인사를 나누며 그의 취향을 기억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오후 책 한 줄 읽는 로망. 그러니 집안에 카페를 꾸며보고 싶은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카페 덕후인 내가 집을 카페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손재주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내게 있어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다. ‘카페를 간다’는 것 자체가 그저 일상을 제거하려는 의식이다. 그렇다 보니 그걸 집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단골 카페를 지정해두지 않고 늘 색다른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도 익숙함을 피하고 싶은 이유다. 돈이 없지 카페가 없나. 도시에서는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면 날마다 예쁜 카페 도장깨기를 할 수 있다.
물론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여행을 가는 것이다.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고통은 대체로 그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바로 호텔’이기 때문에 호텔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결국은 같은 말이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모든 슬픔을 흡수한 물건’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나의 ‘모든 노동을 흡수한 물건’으로 이루져 있다. 살림에 딱히 열심이지 않은데도 그렇다. 아이가 등교하기 전 읽다 나간 책이 굴러다니고 있고, 건조기 안의 빨래는 자기 좀 꺼내 달라고 슈베르트의 숭어를 연주한다. 택배기사가 문 앞에 던진 택배가 스르르 슬라이드 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가스검침원과 아파트 소독원처럼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초인종을 누른다. 스피커에서는 승강기 점검을 예고하거나 쓰레기를 제대로 치우지 않은 세대에 대한 경고 안내가 나온다. 아무 노동을 하지 않아도 집은 그 자체로 시끄럽다. 전업주부로 당연한 일상 아닌가 싶지만 어차피 가족 구성원 하나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의 손길을 거쳐야 하니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옴팡지게 쓰고 싶다. 책은 아이가 오면 또 어질러질 것, 자기 전에 치우면 더 효율적이고, 빨래야 아이 간식 먹는 동안 개켜 넣으면 그만이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럼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김영하나 하루키처럼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명분은 없으니 카페로 간다. 카페에서는 일상과 분리된 예쁜 공간을 5천 원 남짓한 돈에 빌릴 수 있다. 물론 커피도 준다. 대체로 커피 맛으로 승부하는 카페는 자리가 협소하거나 오래 앉아있기 힘들어서 잘 가지 않는 편이므로 예쁜 카페에 들어갔는데 커피 맛까지 좋다면 일석이조다.
원가가 얼마인지 모르는 원두에 5천 원을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과한 돈이다. 그러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퍼져 나오는 부드러운 커피 향과 분주한 에스프레소 기계의 소음, 웅성대는 소리, 근사한 음악, 정리된 공간, 일상과 분리된 인테리어, 바리스타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커피, 이 모든 것들에 내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 소음과 정적, 동시 구매 가능하다.
얼마 전 카페에 관련된 기사 댓글에서 이런 걸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와이프는 물건 하나 살 때는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비교해가면서,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는 건 아까워하지 않더라. 차라리 그거 아끼고 할인에 목숨 걸지 말지.ㅋㅋ"
혹시 우리 남편이 올린 댓글인가. 그 뒤에 달린 크크에서 남편은 아내의 소비가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빌린다는 것을, 물건값을 깎느라 아등바등 대는 생활인의 삶을 스타벅스에서 잠시 미뤄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된장녀라는 조롱 역시 이런 몰이해에서 비롯되었지도 모른다. 남편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물었다.
“혼자 카페를 간다고요? 왜요오?”
그러던 남편은, 남자들도 혼자 카페에 온다는 것을, 심지어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애도 온다는 사실을 알고 문화충격을 받았다. 요즘은 종종 스타벅스 쿠폰을 쏴 주는 걸 보면 아내가 된장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지 세상의 흐름을 이해한 것인지 깊은 속내는 모르겠다.
호퍼의 그림 <자동 판매식 식당> 속 여자는 나처럼 카페에 가는 현대인들의 심정을 잘 설명해주는 그림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런 그녀를 향해 이렇게 표현했다.
가정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 내가 아닐 수 있는 인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호퍼 그림의 묘한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돕는다.
내가 카페에서 나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돕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방법은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쇼핑을 통해서, 누군가는 수다로, 누군가는 조용히 산책을 하면서 풀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카페에 가는 이유 중 몇 가지는 확실하다. 첫째는 집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다는 점, 둘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화 카모메 식당의 명대사처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남이 만들어 준 커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