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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Nov 15. 2017

"노동하는 세계"의 아름다움

알랭 드 보통,<일의 기쁨과 슬픔> (1)

커버 : Peder Severin Krøyer, From Fra Burmeister og Wain's Iron Foundry(1885)



   커피 한 잔에는 물이 얼마나 들어갈까?


   버추얼 워터(Virtual Water)라는 말이 있다. 제품을 생산할 때 실제 완성품이 되기까지 소비되는 물의 양을 뜻한다. 10년 전 한 제약회사 임원이 UNEP 회의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버추얼 워터의 관점에서 본 커피 한 잔에 소비되는 물은 생산, 가공, 유통, 소매 단계에 들어간 물을 모두 합해 140리터 정도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쇠고기 1kg에는 물 1만 6천 리터, 1 리터의 우유에는 물 1천 리터가 소비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소비하는 수많은 상품에는 물뿐만 아니라 노동이 숨겨져 있다. 그 노동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매일 일하며 느끼는 환희와 절망도 그 상품 안에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알랭 드 보통의 2009년 작 <일의 기쁨과 슬픔The Pleasures and Sorrows of Work>은 열 개의 르포를 통해 일상의 이면에 감춰진 노동을 새로이 밝혀낸다.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의 현장을 풍부한 묘사와 독특한 발상으로 생생히 전달하고 '일'에 대한 우리의 상반된 가치관과 갈등도 지적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우리는 왜 일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린다.


   "왜 일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돈이 중요할까 꿈이 중요할까?"


   지금 이런 질문들로 고민하거나 망설이고 있다면, '일'을 쫓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그의 여정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노동하는 세계"


Ship Watchers - July, 1979  ⓒJay Phagan

   어느 날 런던 교외의 항구로 입항하는 화물선을 유심히 관찰하는 '선박 구경꾼'들을 발견한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화물선과 항구 설비는 실용적으로도 중요하고 우리에게 감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왜 그 작업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찾기 어렵다거나 왠지 접근을 막는 듯한 표지판이 붙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베네치아의 몇몇 교회도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숨어 있지만 방문객이 엄청나게 찾아온다. (pg.26)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나도 여행을 가면 교회, 사원처럼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폭포, 산 같이 멋진 자연 풍광을 찾아다녔지, 산업 현장을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억지로 간 포항제철 견학 빼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계여행'이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세계의 일부만을 여행지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사실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하는 세계"는 모른 척한다. 호미곶은 기꺼이 찾아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철소는 외면하는 것이다. 몇몇은 맥주 공장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이 관심 있는 건 공장이 아니라 갓 생산된 생맥주를 시음하는 일 아닌가.


   단순히 우리가 "유조선이나 제지공장, 나아가서 어떤 분야든 노동하는 세계에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저자는 직접 우리를 노동하는 세계로 이끌어 그곳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한다. 2장 <물류>, 5장 <로켓과학>, 7장 <송전공학>이 그런 부분이다. "알랭 드 보통의 산업 현장 여행기"만 쏙쏙 빼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이 부분을 중심으로 읽으면 되겠다.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 사람은 2장 <물류>, 그중에서도 참치 통조림의 유통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포토 에세이만 읽을 것을 권한다. 슈퍼에 진열된 참치 캔의 숨겨진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저자는(이런 게 궁금해질 정도여야 작가가 되나 보다) 몰디브로 날아가 직접 참치잡이 어선에 오른다. 그는 고등어 미끼를 문 참치가 배 위로 올라오고 냉동된 뒤 통조림으로 가공되어 비행기에 실리는, 채 이틀이 안 걸리는 여정을 추적한다. 영국의 평범한 가정집 식탁에서 마무리되는 이 포토 에세이를 읽다 보면, 베네치아의 숨겨진 교회 못지않게 참치 통조림 하나에도 수많은 삶과 이야기, 그리고 노동이 담겨있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구매 가능한 물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로 물품의 유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깜깜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pg.39)



   초등학교 시절, 식사 시간이면 반장의 선창에 따라 "농부 아저씨가 땀 흘려 키운 쌀을 남기지 말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비슷한 구호를 외쳤던 기억이 난다. 잔반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주장을 받아들여 생각해보니, 이 구호는 무의식 중에 소비하는 모든 상품의 이면에 '농부 아저씨'로 상징되는 노동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중국 어딘가의 김치공장 생산라인에 종사하는 왕씨 아주머니라든지, 세네갈 갈치잡이 어선에 오른 소년 노동자라든지.


   그 구호를 외치던 나는 지금 위성 생중계로 손흥민의 활약상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쏘아 올린 통신위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전기장판으로 몸을 덥히면서도 서해안의 화력 발전소와 도시를 잇는 수많은 송전탑에 대해서 무지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 "상상의 빈곤과 실제적인 풍요"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사람을 무감각하게 하는 그 독특하게 현대적인 느낌"이라 비판한 이 노동에 대한 무관심을 우리는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관심에서 빚어진다


Jacob van Ruisdael, The Windmill at Wijk (1670)
   이 책(<네덜란드 풍경에서 전기 철탑의 아름다움>)은 처음에는 산업적 구조물이었던 풍차도 지금의 철탑과 마찬가지로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물체였다고 강조한다. (...) 
   풍차가 재평가를 받은 것은 많은 부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위대한 화가들의 업적이었다. 이 화가들은 조국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실용적인 구조물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들에게 캔버스에서 자랑스러운 자리를 내어주고, (...) 가장 멋진 면들이 부각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pg.236)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쏟는 관심에서 빚어진다. 예를 들어 평범하거나 오히려 못생긴 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그맨 유재석이 잘생겨 보이는 건 그가 받고 있는 사회적인 호감 때문이다. 유재석처럼 절대적으로 잘생기고 예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아 빛나는 사람들을 소위 '사회가 만든 미남/미녀'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평야에 흩어진 풍차는 '사회가 만든 경치'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산업 현장과 노동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만 했을 뿐 아니라 직접 아름다움을 빚어내고자 하였다. 이 책 자체가 일상생활의 이면에 감춰진 노동을 '글'이라는 형태로 담아내어 재조명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풍경에서...>의 최신판이 바로 <일의 기쁨과 슬픔>인 것이다.


ⓒトヨタ産業技術記念館

   다행히 "노동하는 세계"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여름 방문했던 일본의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이하 도요타 기념관)은 나고야에 위치한 도요타의 초기 생산공장과 본사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도요타의 발전사를 전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처음에는 드럼통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던 것처럼, 도요타는 방적/방직 공장으로 역사를 시작했다. 도요타 기념관에서는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내고, 실을 원단으로 짜내고, 원단을 염색하는 모든 과정을 관람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가장 전통 방식부터 최신 생산공정까지 면직의 발전사를 하나하나 몸소 느끼다 보니 우리가 별생각 없이 입었던 티셔츠 한 장에도 수많은 '일'이 들어간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도요타 자동차의 역사를 소개한 전시 후반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시 내용도 내용이지만 도요타 기념관의 공간에서도 노동의 현장을 관람객에게 최대한 아름답게 전달하고자 고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도요타 기념관은 도요타 초기 생산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일본 경제산업성으로부터 산업근대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세기 초반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공장 건물의 건축미를 그대로 살린 것은 물론이고, 시대별로 지붕에 사용된 부재를 그대로 노출시켜 전시하여 공장도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수많은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기술자들이 적어 내려 간 난해한 방정식은 일상의 언어보다 간결하고,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로켓과 과학자들의 능력은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렇듯 우리가 매일 누리는 모든 것의 이면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노동하는 세계"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 물론 그 세계와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저자 알랭 드 보통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pg.234)


   그러나 <일의 기쁨과 슬픔>에 세밀하게 묘사된 '일의 세계'에 한 번 다녀온 이상, 그곳을 더 이상 잊고 살아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포터>를 읽고서 언젠가는 내게도 호그와트 입학통지서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처럼. 눈치채지 못했던, 잊고 지내던 우리 주변의 노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시각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계속)




분량상 나누어진 (2)편에서는 이 책의 또 다른 반쪽인 '일'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과 갈등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고도로 분업화된 비스킷 공장, 돈보다는 가치를 좇는 화가, 현실적 직업의 최첨단인 회계사, 그리고 일에 대한 우리의 갈등을 일선에서 다루고 있는 직업상담사가 등장한다. 일에 있어 의미가 중요한가 실용이 중요한가?

↓(2)편 보러가기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 전시내용 사진 : ⓒ스마일샘, http://blog.naver.com/hhp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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