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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Oct 27. 2017

일본 사회학자가
한국에 보내는 위기신호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군 생활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지금, 어느새 병장이 된 주변 선후임과 얘기를 나눠보면 군 생활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하루빨리 전역하고 싶다". 둘째는 "처음엔 힘들었는데 좀 지나고 보니 생각보다 할만하다". 보통 이 둘 중 한 가지 감정만 느끼는 사람은 없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양쪽을 복합적으로 느끼는 듯하다. 전역자들의 회상도 이런 양가감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략 이런 것이다.

"군대,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좋은 추억이다. 근데 다시 가라면 차라리 죽겠다."


   20대라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 중 2년가량을 온전히 반납하고, 노동의 대가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군 생활을 어떻게 "할만하다"라고 여기고 전역 후엔 왜 '나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는 것일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변변한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힘들게 구한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탈조선'을 꿈꾸기도 하거나 아니면 아예 현실에 적응하여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고 대신 나름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 누구나 마땅히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본적인 생활마저 사치가 되어버렸는데 우리는 왜 이것을 애써 무시하고 작은 기쁨에 눈을 돌리는 걸까.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寿의 2011년* 작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絶望の国の幸福な若者たち>은 일본 사회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는 왜 오히려 상승하였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책을 읽으며 '일본'을 '한국'으로 치환해서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으니, 출간 6년 후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후루이치가 바라본 일본 사회와 지금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비슷한 지, 또 어떻게 다른 지 계속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 책이었다.

*국내 출간은 2014년



컨서머토리화와 작은 행복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각종 사회 문제가 대두되는 지금, 젊은이들이 행복감을 느끼는 첫 번째 이유로 '컨서머토리화'를 든다.

"컨서머토리란 자기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pg.136)

   20세기 젊은이의 목표가 경제 성장과 부의 축적이었다면, 더 이상 경제적 성공이 어려워진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보다 "신변에서 가까운" 만족감을 좇는다. 일본에는 크게 돈을 쓰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생활을 다채롭게 해 주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한가득이다. 겨우 4~5번 일본 여행을 다녀온 내가 꼽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편의점에 가면 갖가지 먹거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고, 다양한 취향을 '저격'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구할 수 있다.(메이드 카페라든지...) 일본이 괜히 '덕후의 천국'이 아니지 않나.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는 '작은 행복 좇기'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2016년)에 돌연 한국 전역을 강타한 인형뽑기 유행은 우리나라에서 '작은 행복'이 점점 주목받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가족 여행을 간 제주도에서도 꽤 큰 인형뽑기방을 목격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상당했다. 거창한 취미 생활을 하기에는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럽고 시간도 많이 뺏기니 천 원짜리 지폐 넣고 잠깐 즐길 수 있는 인형뽑기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곳곳에 생겨난 코인 노래방도 같은 맥락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올 상반기 한국에서 주목받은 'YOLO족'의 등장도 한국 젊은이들의 컨서머토리화를 보여준다. '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한 번뿐인 인생 지금 행복한 일을 하자"는 일종의 구호이자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영미권에서는 유행 지나도 한참 지난 이 말이 왜 갑자기 한국에 상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젊은이들의 증가는 저자 후루이치가 정의하는 컨서머토리화에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든다.


   논리의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의 수가 급증한 것도 '작은 행복'을 좇는 현상과 맞닿아있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젊은이들이 '작은 행복'을 더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일본을 여행지로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여행 그 자체도 '작은 행복'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많은 저가 항공사의 등장으로 일본행 항공권 가격이 10~20만 원 대로 하락하였고, 클릭질에 능한 사람이라면 단돈 5만 원에도 일본행 티켓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큰돈 들이지 않고도 해외여행 기분을 낼 수 있는 가까운 곳, 그곳이 바로 일본인 것이다. 대마도(쓰시마)가 1박 2일 여행지로 인기를 끌게 된 것도 이런 흐름 때문일 것이다.



대도서관 팬과 촛불시위 참가자에겐 같은 동기가 있다


   '컨서머토리화'라는 분석이 물질적인 부분에 주목했다면, '동료'라는 요소는 젊은이들의 행복에서 인정 욕구와 관련된 부분을 들여다본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만족감에 집중하여 행복감을 느낀다면, 인정 욕구와 같은 감정적인 행복은 작은 집단에 모인 동료들에게서 찾는다는 설명이다.

"마치 한 마을에 사는 주민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다. 사회학에는 '상대적 박탈'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소속돼 있는 집단을 기준으로 행복을 가늠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pg.141)


   요컨대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인정받는 방법이었다면, 그게 어려워진 지금은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에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서 행복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신문과 TV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까운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일도 적어진다.


   '작은 세계'에서 동료를 찾아 서로 의지하는 흐름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도 떼어놓을 수 없다. 20세기까지의 미디어 환경은 텔레비전과 신문, 잡지 등이 중심이었던 반면, 지금은 미디어 환경의 중심에 인터넷이 자리하고 있다. 쌍방향, 다자간 소통이 보다 쉬운 인터넷의 특성상 젊은이들은 "일본 사회라는 공통된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비슷한 동료들과 취향 공동체를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구독자 150만 명 이상을 보유한 크리에이터 대도서관


   본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스타 유튜버'와 '스타 BJ' 등 인터넷 셀러브리티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이런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런 흐름을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감 상승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분석했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므로 다소 틀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셀러브리티가 그들의 컨텐츠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커뮤니티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장(場)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예를 들자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도서관' 채널에서 어울리고, 메이크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포니' 채널에서 의견을 교환한다.


   이런 흐름이 취향 공동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에서도 나타난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저자는 두 장에 걸쳐 일본의 여러 사회 운동 현장을 들여다본다. 원자력 발전 반대 집회에서부터 재특회(일본의 대표적 우익 단체)의 집회까지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집회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참여 동기는 의외로 서로 닮아있다. 대부분 처음에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같은 단체에 속한 친구들이 좋아 계속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정말 재미있어요. 이제야 진정한 동료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 마음을 둘 곳으로 이러한 곳을 찾고 있었다. 동료는 동료잖아요."

   첫 번째는 재특회 회원의 답변이고, 두 번째는 프리터 노동운동 회원의 답변이다. 결국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마저도 '동료'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연합뉴스

   한국의 각종 사회 운동과 집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각각의 운동과 집회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성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욕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젊은 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대규모 집회가 그렇다. 2008년의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2016년의 대통령 하야/탄핵 촛불집회가 대표적인 예시다. 이들 집회는 무리한 무역 개방 정책이나 대통령의 반헌법적 행위가 집회의 시발점이었으나, 대규모 집회가 장기간 계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젊은이들의 '동료' 찾기도 상당 부분 기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넷 셀러브리티에 대한 관심과 국가적 관심을 일으킨 집회의 일면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동기가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미래의 희망이 없어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행복의 대상을 찾고, 동료들과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오사와 마사치 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한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전 교토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지금 만족한다"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딱히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


   글 시작에서 언급한 군 생활도 마찬가지다. 전역일이 정해져 있는 군 생활이라도 적어도 그날까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름의 만족감을 찾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떨까? 7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계속해온 한국 경제는 이제 2%대 성장률 달성도 불안해하는 처지에 있다. 성장이 둔화되니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꺼리게 되었고, 당연히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의 지원을 받아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려워한다. 저성장 사회가 가시화되고 피부로 느껴지는 경기도 어렵다 보니 기성세대처럼 '열심히 일해서 저축하고 그 돈으로 내 집, 내 차를 마련'하는 일은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부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나마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누리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이렇게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나름의 방법으로 행복을 찾고 있다. 내 주변에서 '작은 행복'을 찾고, 그것을 함께할 '동료'를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거창한 소비를 통해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고자 한다. 인터넷에서는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모여 어울릴 수 있다. 생각하다 보니 이게 과연 문제일까 싶다. 개인이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이것 또한 행복한 삶 아닐까? 한국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각종 사회 문제가 드러난다고 해도 개인이 행복하고 만족한다면 문제없는 것 아닐까?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도 같은 생각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굳이 '일본'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일본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라고 초조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일본이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뭐!'라는 생각만 든다. (일본이 망하더라도) 역사가 가르쳐주었듯이 인간에게는 어떠한 상황 속에도 의외로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있다." (pg.315-316)


   뒷간에서 안 닦고 나온 것마냥 찝찝한 결론이다. 하지만 애초에 '젊은이들의 행복'이라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취지의 책이었으니 구체적인 대안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도 무리다. 다만 후루이치는 이렇게 지적한다.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해도, 그 '행복'을 지탱해주는 생활 기반은 서서히 썩어 들기 시작했다." (pg.35)

   미래에 희망이 없어도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 '나름의 행복'마저도 장기적으로는 누리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 일본과 한국의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경기침체를 겪긴 했지만 제조업 기반이 튼튼하고 큰 내수시장을 가진 경제대국이다. 반면 한국은 일본보다 내수시장도 작고 건실한 중소기업도 적다. 양국에서 '행복'을 지탱해주는 생활 기반이 서서히 썩어 들기 시작할 때, 그것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하는 쪽은 한국일 것이다.


   그래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한국에 보내는 위기 신호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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