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 (1)
나의 미국, 나의 캐나다
프롤로그 ― 워싱턴D.C. ― 나이아가라 ― 몬트리올 ― 퀘벡 ― 보스턴 ― 뉴욕
워싱턴 D.C. 편 : (1)(2)(3)
난생처음 인천공항에 홀로 남겨져 탑승 시간을 기다리던 불안감도, 하와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정신없이 비행기를 갈아탄 일도, JFK 공항에 내리자마자 워싱턴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두른 것도, 20여 시간의 비행 후 5시간 더 버스를 타며 옆자리 아저씨와 잡담을 나눈 것도 굳이 길게 풀어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여행의 첫날은 피곤했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열심히 계획을 짤 때만 해도 내내 즐거울 줄 알았던 여행길은 사실 졸음과 피로 투성이였다. 기내식의 더부룩함도 덤으로 딸려왔다.
꼬박 하루가 걸린 여정은 워싱턴 시내 한 호스텔에서 끝났다. 나보다 한 발 빨리 도착한 투숙객을 안내하느라 카운터 직원이 바쁜 탓에 거대한 캐리어 가방에 걸터앉아 로비를 둘러보았다. 칠판에 쓰인 어느 여행자가 남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YOLO.' 지금이야 9시 뉴스에도 등장하는 단물 빠진 유행어지만, 당시엔 그 말에 꽤나 감명받았었다. '그래, 한 번 사는 인생 한 달쯤 혼자서 여행도 해봐야지!' 이런 생각도 해보고. 그러나 노곤함이 이내 다시 몰려왔다.
'아 피곤해서 여행이고 뭐고 곧 죽어버릴 것 같다... 한번 사는 내 인생에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렇게 몸이 피곤하면 생각도 부정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피로가 사고를 지배하는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방문을 열었다. 네 명이 한 방을 쓰는 도미토리 식의 방이다. 작은 방에 이층 침대 두 개가 쑤셔 넣어져 있고, 욕실과 화장실은 복도에 있는 것을 공용으로 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군대 생활관과 판박이다. '나는 너무 곱게 자라서 군대에 가면 어떡할지 걱정이다' 싶은 군 미필자라면 호스텔 생활을 한동안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첫 호스텔 룸메이트 블레이크(Blake)이었다.
블레이크는 미국인이다. 여행을 계획하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호스텔에서 어울리는 '위 아 더 월드'를 기대했는데, 왠지 처음부터 (이태원에도 많은) 미국 사람을 만나 김이 샜다. 혼성 도미토리인데 떡대 좋은 미쿡형밖에 없었던 것도 내심 아쉽고... 짐을 풀며 짤막히 얘기를 나눠보니 남부 플로리다의 탬파라는 도시에서 왔단다. 워싱턴의 정부기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머물 곳을 마련하기 전까지 잠시 호스텔에 머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블레이크는 이층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며 통성명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뭐 하러 왔는지, 지금까지 여행은 어땠는지 간단한 호구조사가 이어졌다. 나는 호스텔에 묵는 건 처음이라 기대만 많았지 어떻게 인사를 건네고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지 전혀 몰랐는데, 그런 나에게 블레이크는 '호스텔 매너'를 직접 알려준 것이다.
'오호, 호스텔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인사하고 말을 걸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그 후로도 줄곧 블레이크의 인사를 따라 했다. 그러다 뉴욕의 한인민박에서도 갓 도착한 여행자에게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는데,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서양식 인사'에 그분이 꽤나 당황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형과도 어색한 인사를 계기로 꽤 친해지긴 했지만. 그렇게 첫 호스텔 룸메이트 블레이크의 반가운 인사는 아직도 내 기억과 습관이 깊이 새겨져 있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항상 반갑게 인사한 덕분에 어색하게 지나칠 뻔했던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나에게 살가웠던 것은 물론, 내가 혼자서도 즐겁게 여행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친구가 바로 블레이크였던 것이다.
('서양식 인사' 말고도 블레이크와 함께 지내며 이것저것 배운 게 많다. 당시 대유행이었던 체인스모커스의 <#Selfie>라든가, 아직 국내엔 유저가 많지 않았던 스냅챗이라든가. 그가 뭘 많이 알려줬다기보단 내가 외국 문화에 무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집을 출발해 이 침대에 눕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평소에는 하루에 기억에 남는 일이 한두 가지밖에 안 되지만, 오늘은 인상적인 기억만 떠올려 봐도 다 되새기는 데 한참이 걸린다. 평소엔 세월이 그저 내 옆을 흘러간다면, 오늘은 세월을 하나도 안 피하고 맞은 것 같다. 그만큼 빨리 늙고 싶지는 않지만. 긴 여정에 진이 빠졌던 기억도, 처음 본 누군가의 반가운 인사도 머릿속에 하나하나 새겨져 이 글을 쓰고 있는 4년 후 지금까지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여행의 첫날은 기억 속에 깊고 단단히 새겨진다. 아마 일상과 일탈 사이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겨울, 따뜻한 방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한기가 일순간 밀려오는 것처럼.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우리는 쉽게 피곤해지기도 하지만,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흥분되는 시점을 꼽자면 역시 첫날일 것이다. 바로 전날까지의 일상을 가장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는 여행의 첫날, 여행이 선사하는 새로운 발견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보니 여행에 첫날이 딱 하루만 있다는 게 못내 아쉽다.
'하루에도 이렇게나 많은 추억이 남았는데 앞으로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물론 이후 여행길에서의 모든 날이 첫날처럼 생생히 기억에 남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수많은 기억과 감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만 한 채 짧은 낮잠에 들었다.
이 승 곤 : Seunggon LEE
―가늘고 길게 여행과 사진,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배우는 사람"이라는 은사님 말씀이 아깝지 않도록 살고 싶습니다.
rupert1128@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