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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Sep 30. 2022

마감한 다음 날은 오픈하지 마세요

캐나다 스타벅스에서 배운 일과 나의 균형

클로-오픈(Clo-open)*은 하지 말도록 해.


*클로-오픈(Clo-open): Closing과 Opening을 합친 말로 마감 쉬프트를 한 다음 날 오픈 쉬프트를 하는 것을 말하는 비공식 줄임말이다.


이 날은 스타벅스 북미 지역 대표인 로잔 윌리엄스(Rossann Williams)가 밴쿠버 다운타운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분주했다. 우리 매장 페이스북 그룹 페이지에 매니저는 로잔의 프로필 사진을 공유하며 매장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음식 추천이나 서비스에 더 신경 쓸 것을 당부했다.

이전에도 몇 번 이 분이 밴쿠버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 매장에 들르지 않았거나 내가 일하지 않는 시간에 와서 나는 실제로 이 분을 뵌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하며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마감 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매장의 마감 시간은 열 시. 매장 문을 닫고 마감 업무까지 끝내면 열 시 반에 퇴근하게 된다.

보통 높은 사람들이 매장을 방문한다고 하면 오전이나 낮 시간에 오기 때문에 저녁 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오늘은 안 오겠구나.

게다가 캐나다는 저녁 8시만 지나도 카페에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드는데, 이 날은 유독 한가했다.

저녁 9시. 미들 근무자는 퇴근을 하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미리 해둘 만한 마감 업무를 살살해가며 나는 계산대 앞에 있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마감을 하는 슈퍼바이저는 백오피스에서 정산 업무를 하고 있었다.


딸랑.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Hello!" 인사하며 들어온 손님을 쳐다보니 무언가 낯이 익었다. 편안하게 방문한 듯 하지만 느껴지는 위엄이랄지, 고급스러움이랄지. 그렇다. 아침에 매니저가 올려준 사진 속 주인공, 로잔이었다.

은빛의 짧은 파마머리에 안경을 쓴 그녀는 딱 봐도 포스가 넘쳤다. 갑자기 확 긴장이 됐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평소 손님을 대하듯 말을 걸었다.


로잔은 낮에 커피를 충분히 많이 마셨는지 커피 대신 RTD(Ready-to-drink) 코너에 있는 과일주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케일이 들어간 초록색 착즙 주스를 집어 들고 내게 물었다. 이 음료는 어떻게 마시는 게 좋냐고.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눈치도 없는 혀는 자꾸 내 영어를 가로막았다. '보통 얼음컵에 담아 마시거나 얼음과 블렌딩 해서 먹기도 한다'라고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그랬더니 초록색 음료를 두 개 집어온 로잔은 하나는 얼음컵에, 다른 하나는 블렌딩을 해서 달라고 주문했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드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뭔가 찔리는 기분,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그 긴장은 나를 더 버벅거리게 했다. 백오피스에 있는 슈퍼바이저는 언제 나오는 건지!


그러다 블렌딩 할 때 넣는 얼음 양을 잘못 계산하고 말았다! 벤티 컵 하나에 충분히 담길 줄 알았는데 음료가 한참 남았다. 아뿔싸.. 흔들리는 동공 뒤로 어쩌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로잔이 남은 건 다른 컵에 담아야 할 것 같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블렌딩 한 음료를 두 개의 컵에 담아주고, 얼음컵에 담은 주스까지 세 잔의 음료를 트레이에 담아서 로잔에게 줬다.

때 마침 나온 슈퍼바이저는 로잔을 발견하고 살짝 당황을 했다가, 반갑게(자연스러운 척) 인사를 했다.

우리 매장을 평가하려고 온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개인 일정 차 방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잔은 음료를 받아 매장을 나섰다.


휴우. 이런 순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밤 시간이라 푸드 추천도 못해주고, 컵 실수도 해버렸는데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오늘 방문했으니 이제 다른 날에는 오지 않겠다는 마음에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저 마감 업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공교롭게도 오픈을 하는 날이었다.

오픈 근무는 5시 출근. 전날 마감 근무였기 때문에 집에 오자마자 잠을 자기에도 빠듯한 시간이긴 했지만 '스케줄이 그렇게 나온 걸 어쩌겠어'라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출근을 했다.

푸드 쇼케이스를 세팅하고, 브루잉 커피를 내리며 매장 문을 열었고, 8시부터 9시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출근길 모닝 러시를 착착착 쳐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줄이 점차 줄어들고, 이제 한 숨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였다. 나는 계속 틸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Good Morning! What can I get for you today?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뭘로 드릴까요?) "


습관처럼 손님이 올 때마다 주문받는 주문(呪文)을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두둥. 북적이는 손님들 사이 어제 왔던 그녀가 있었다. 로잔의 차례가 되어 주문을 받았다. 그래도 어제 한 번 봤다고 괜스레 마음이 편하고 반가웠다.

커피를 주문하던 로잔은 약간의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Weren't you closing last night? (혹시 어젯밤에 마감하지 않았어?)"

"Yeah! That's right! (오 맞아!)"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 그 잠깐의 방문으로 나를 기억했다는 사실이 약간은 신기했다. 무려 스타벅스 북미 지사 대표가 나를 기억한다고?

어젯밤의 실수를 만회하듯 오늘 아침엔 능숙하게 그녀의 주문을 받아넘겼다. 커피를 받은 로잔은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스타벅스로 출근했다. 백오피스에서 출근을 찍으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I don't want you to do clo-open again. If that happens, let me know so I can adjust the schedule.

(앞으로 마감한 다음날은 오픈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서 스케줄을 조정하도록 해.)"


처음에 듣고는 잘 이해가 안 갔다. 마감하고 오픈하는 게 뭐 어때서? 물론 스케줄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쉬프트를 바꿔야 한다는 동료와 근무 시간을 바꿔서 그렇게 된 거였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쉬프트를 받아들인 거니까 어느 정도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파트너의 컨디션을 위해 마감하고 오픈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지양하겠다는 매니저의 말에 나는 문화 충격을 받았다.

매니저가 이 얘기를 하는 건 분명 어제 있었던 로잔과의 대화에서 온 영향일 터였다.

이틀 연속 방문하며 나를 알아본 것도 신기했는데, 나의 근무 시간을 캐치해서 컨디션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그리고 그 주체가 하늘 같이 높아 보이는 스타벅스 북미 본사의 대표라니?

무언가 감동과 충격이 한 번에 일었다. 그리고 직원의 복지를 우선하는 스타벅스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다시 곱씹었다.


요즘은 MZ 세대다- 하며 회사나 조직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의 삶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난 Z세대와 베이비붐 세대에 껴있는 M세대로서 '까라면 까'라는 마음을 탑재하고 있었다.(M세대와 Z세대 사이엔 거대한 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내 일정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이 민폐 같았고, 내가 이 쉬프트를 해주지 못하면 일할 사람이 누가 있지? 매장이 잘 돌아갈 수 있나? 하며 매니저에 빙의해 매장을 과도하게 걱정했다.

그러므로 스케줄이 정해진 상태에서 마감 다음 날 오픈을 하든, 오픈을 일주일 내 내하든 그건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체력이나 개인 사정이 낄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에겐 이 경험이 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직장과 나의 일상 사이가 일방이 아닌 쌍방인 관계. 나의 삶을 직장에 투자하는 만큼 직장에서도 나의 삶을 존중할 의무. 그런 것들이 확 와닿았다.

생각해보면 직장과 나는 독립적이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존재인데, 왜 나는 나를 지우고 직장과 하나가 되려고 했을까? 이 또한 과한 책임감이었을 뿐이었다.


캐나다 동료들의 근무에 대한 태도 역시 나에겐 놀라웠다. 일례로는 출근 시간이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이때 당시(2015년) 한국에서 카페 알바를 할 때 10분에서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출근 준비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에서 일을 할 때도 15분 정도의 시간을 계산해서 미리 도착하곤 했다.

그런데 슈퍼바이저가 문을 열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오픈 시간에 15분이나 일찍 도착한 나는 항상 최소 1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한겨울에 매장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오들오들 떠는 게 반복되면서 결국 10분 늦게 나가는 것으로 나와 타협했다. 물론 이들도 항상 종이 땡! 치면 도착하는 건 아니었지만, 미리 와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가 없었다.


쉬프트를 바꾸거나 매니저가 스케줄을 짤 때 자신의 일정을 어필하는 것도 달랐다. 내가 한국인 치고도 유독 눈치를 많이 보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나는 동료 대부분의 고정적인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는데(학교라던지, 투잡이라던지) 그러다 보니 내가 여행을 간다거나 약속 때문에 스케줄을 바꿔달라고 하면 그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여행 약속도 스케줄이 나오기 전 까진 웬만해서 잡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달랐다. 미리 말할 수 있는 일정이면 당연히 미리 말을 해 조율을 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제 마감해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휴가를 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프트를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게 자연스러웠다.(그렇다고 허구한 날 일을 빼먹는다는 건 아니다.) 만약 우리 매장에 일 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매장의 파트너를 빌려오면 되는 거였다.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에게 자연스러워질 때쯤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국에 와서 나는 또 스타벅스 파트너가 되었는데 출근 준비 시간이라는 명목으로 15분을 일찍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모자까지 갖춰 써야 했다. 기본적인 근무 시간은 주 5회 하루 최대 5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종종 매장이 바빠 자연스럽게 오버타임을 했다. 본사에서 프로모션 행사라도 할라치면 매니저나 슈퍼바이저는 당연히 근무가 끝나고도 남아있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워라밸 인식이 높아졌고, 회사 측에서도 직원의 복지나 행복을 많이 신경 쓰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라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다행이지만, 아직까진 사회 전체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생각이다.


일과 삶의 균형. 회사와 나의 균형. 균형이란 것은 뭐든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중심점은 반드시 정 가운데가 아닐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힘을 주더라도 딱 맞는 균형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직장은 직원에게 존중을, 직원은 직장에 책임을.

그렇게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반복하며 모두가 더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로잔이 내게 마감 다음 날은 오픈하지 말라고 당부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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