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스타벅스에서 배운 피드백의 자세
고달픈 하루였다.
스타벅스에서 오픈 업무를 배우고 처음으로 혼자 오픈을 하게 된 날이었다. 오픈 교육을 받을 땐 그냥 사진에 나와있는 디스플레이를 따라서 빵을 진열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막상 혼자 쇼케이스 앞에 놓이니 머리가 하얘졌다. 디스플레이 예시가 있는 종이가 어딨는지도 잘 모르겠고, 혹시 물어보면 이것도 모르냐고 할까 봐 자연스러운 척 서류를 뒤적였다.
기억에 의존해 빵을 뜯고 진열을 하는데 긴가민가하는 부분에서 조금 망설였더니 벌써 매장 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하필 또 부지런한 손님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 샌드위치는 오븐에 살짝 데운 후 종이를 감싸 진열해야 하는데 아직 그쪽은 건드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얼른 진열을 끝내지 않으면 손님이 더 몰려올 것 같았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오픈 정산 업무를 끝내고 나온 오늘의 오픈 동료인 슈퍼바이저 콜니에게 이거는 어디에 진열하면 되냐고 물었다.
콜니는 디스플레이를 안 해서 모른다고 했다. 그러고서 여긴가? 하며 이리저리 진열을 도와줬다. 출근할 때부터 피곤하다고 했던 콜니에게 아침부터 긴 하루를 만들어준 것 같아 미안했다.
오픈 업무가 마무리되고, 오전 피크타임을 대비해 다른 오전 근무자들이 출근했다. 나는 커스터머 서포트를 맡았다. 출근 시간 피크 타임에는 브루잉 커피가 정말 많이 나가기 때문에 커스터머 서포트는 커피가 떨어지지 않게 잘 관리해줘야 한다. 나름대로 커피 새로 내릴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아있는 줄 알았던 파이크 로스트(미디엄 로스트)가 똑 떨어지고, 부랴부랴 새로운 배치를 내리기 시작했다. 브루잉 커피가 다 내려가려면 15분 정도가 필요하고, 중간에 미리 내려온 것을 따르더라도 5분이 걸린다. 파이크를 시키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크 로스트로 권유하거나 5분 정도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다크 로스트마저 다 떨어져 버린 것..!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다.
세상에.. 내가 뭘 한 거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시간대엔 커피 관리를 잘했어야 하는데, 가장 많이 나가는 미디엄과 다크 로스트를 둘 다 품절시키다니 말이다.
주문을 받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평소와 같이 출근길에 들렀다가 낭패를 본 손님들에게도 너무나 미안했다. 그리고 모두가 날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진 않을까 자괴감이 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뜯어 놓은 원두도 다 써서 꺼내야 하는데 원두가 어디 있는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창고에 들어갔다. 줄리가 Bottom에는 없냐고 물었는데, 그게 어딘지 잘 모르겠어서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Bottom은 브루잉 머신 아래 서랍을 말하는 거였고, 그 안에 미리 꺼내 둔 원두가 아주 많았다.
아.. 일도 못하는데 말도 못 알아들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상황이 해결되고 조금 한가해지자 괜한 민망함에 쭈뼛거리며 다가가 나의 민폐를 사과했다. 그랬더니 다들 굉장히 쿨하게 반응했다.
"에이, 처음인데 뭐 그럴 수 있지. 커피통을 이렇게 기울여서 이 정도 있으면 새 배치를 내리면 돼."
"괜찮아, 다음부턴 좀 더 신경 쓰면 돼. 잘하고 있어!"
"다 익숙해지게 돼있어~ 원두랑 부가 재료는 미리 창고에서 꺼내서 이쪽에 넣어두고 있어."
평소에도 동료들이 칭찬에 굉장히 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다른 동료의 실수를 타박하지 않고 따스하게, 그러면서도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팁까지 알려주는 정성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스윗한 동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다음부턴 실수하지 않도록 더 애쓰게 됐다.
다음 날 또다시 오픈이었다.
오늘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다짐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가자마자 출근 등록을 하고, 빵 트레이를 촥 끌고 왔다. 빵 봉지를 가위로 슥슥 잘라 착착 진열하고, 샌드위치 두세 개씩 한 번에 데운 후 종이를 감았다. 어제는 그렇게 오래 걸리던 일이 두 번째라고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매장 문을 열기 전에 진열을 끝낼 수 있었다.
한 번에 두 종류의 커피를 잃어보고 나니 이제는 커피를 확인하는 주기를 스스로 조절할 줄도 알게 되었다. 커스터머 서포트는 15분짜리 타이머를 차고 다니며 타이머가 울릴 때 커피를 확인하지만, 피크 타임에는 지나갈 때마다 남은 커피양을 확인해서 미리 원두를 갈아놓고, 바로 내릴 수 있게 다 내려진 커피통을 옮겨놓았다. 나중에는 그것과 더불어 주문이 바쁠 때 오더 서포트도 하고, 누가 말하기 전에 주문 들어온 샌드위치를 데워서 미리 갖다 주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이 때는 정말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나의 이 모든 성과는 결국 한 번의 실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실수를 했음에도 서로 돕고 보듬어줄 수 있는 동료가 있어 더 적극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여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캐나다 스타벅스에서 일하며 실수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몰라서 그랬거나, 부주의했거나. 하지만 실수를 한 번 하고, 피드백을 받고 나면 반복되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잘못에 대한 피드백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에서 무언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왜 그랬어?'라는 질문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오히려 평서형 문장으로 '앞으로 이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라던가 '이렇게 하도록 해.'와 같은 말을 주로 들었다.
즉, 실수를 한 상황에서 실수를 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원인을 깊게 파기보다는, 실수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상황에 대한 지시나 제안만을 하는 것이다.
그런 피드백을 받고 나면 '아, 이렇게 고치면 되는구나!'라는 것에 오히려 동기부여를 받았다. 그래서 같은 실수는 더욱이 하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고, 피드백을 준 사람에게도 별다른 개인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에는 이러한 피드백 방식이 어떻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체감한 것은 내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 스타벅스 코리아에서 근무를 하면서다.
나는 캐나다 스타벅스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스타벅스 파트너에 지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근무한 지 3개월 만에 나는 스타벅스를 그만두었다. 손에 습진도 심해졌고,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보다 큰 이유는 캐나다 때와 비교되는 피드백 방식에 있었다.
모든 매장이 같지 않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같지 않으므로 '한국은 이렇다'라고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막연히 캐나다에서 일을 하며 느꼈던 안정감은 아마 이것에 있지 않았나 싶다.
한국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주문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톨 사이즈 텀블러를 들고 오셔서 그란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는 텀블러 사이즈를 확인한 후 손님께 '이 텀블러 사이즈는 톨인데 그란데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셨다. 혹시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를 원하시는 거냐'라고 물었다. 손님은 그렇다 했다. 그리고 나는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옵션을 누를 수도 있었지만, 손님이 그란데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므로 영수증 상에 착오가 있을까 싶어 그란데 아메리카노로 결제를 했다. (가격은 같았다.)
그런데 곧이어 바에서 음료를 만들던 슈퍼바이저가 나에게 왔다. 이 손님 텀블러가 톨 사이즌데 그란데 사이즈로 주문을 잘못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위의 상황을 설명했다. 샷 추가를 원하시는 걸로 확인했다고. 그런데 슈퍼바이저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더니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한 것과 그란데 아메리카노가 같아요?' '왜 그랬어요?' 라며 나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물론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를 하는 것과 그란데 아메리카노는 물의 양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이미 확인했다 분명! 그리고 그걸 전달했고!
하지만 슈퍼바이저는 그 말은 무시한 채 자꾸 나에게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캐물었고, 나는 그냥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끝내 손님에게 '지금 텀블러가 톨 사이즌데 저희 파트너가 그란데 사이즈로 잘못 주문을 받아서 텀블러에 넣고 남은 음료는 따로 종이컵에 제공해드려도 되냐'라고 물었다. 아주 상냥하게 말이다. 손님은 별로 상관없다는 반응을 하며 음료를 받아가지고 갔다.
실수는 보통 의도치 않게 발생한다. 물론 의도치 않은 습관이 잘못되었다면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미 벌어진 실수에 대한 이유를 캐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어쩌다 발생해버린 실수에 대해 나의 사고 회로와 행동을 하나씩 쪼개어 말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대답을 한들 과연 그 대답에 만족할까?
결국 실수의 원인을 캐묻는 행동은 사과를 받기 위한 장치일 뿐 아닐까?
오히려 이런 피드백을 받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까지도 안 좋아진다. 나에게 사적인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타박을 하는 건가 싶고, 평소에 다른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나 의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조금 더 나서서 할 일도 하기가 무서워진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할까 봐. 일을 더 하려다가 실수 한 번에 잔소리를 듣느니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듣는 게 낫지 않은지.
캐나다와 한국이라는 국가로 딱 나누어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캐나다를 다녀온 직후 한국에서 같은 브랜드에 근무하며 느꼈던 점이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피드백을 주는 입장이 되면 실수를 한 '사람'에 대한 비난이 아닌 '행동'에 대한 방향성만 제시하겠노라고.
나는 여전히 피드백받는 게 두렵다. 회피형 완벽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막연한 피드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언가 완성이 됐다고 느낄 때까지 밖에 내놓지도 못하고, 언젠가의 완성만을 꿈꾸며 '노력만'한다. 무언가 일을 할 때도 중간 피드백을 받기 위해 큰 용기를 내야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된 기저에는 우리가 살아오며 받은 피드백의 형태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캐네디안에게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