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기념도서관 - 2023 예술가와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지난해 도봉구에 위치한 김근태 기념도서관의 예술가와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예술로 표현하는 우리, 생태계: 계절일기> 여름편의 주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김근태기념도서관은 민주화 시대를 격렬히 살아낸 故 김근태 선생을 기리는 도봉구 최초 민주주의 라키비움 문화시설이다. 도서관은 다양한 시민들을 위해 도서, 기록, 전시, 공연, 체험, 교육문화프로그램 등을 통해 평화, 인권 등의 가치를 옹호해 왔다.
<예술로 표현하는 우리, 생태계: 계절일기>는 예술을 매개로 순환하는 생태계 속 인간의 위치를 파악하고, 생태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문학, 시각예술, 음악, 연극 장르의 예술가와 사계절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맡은 계절은 여름이었다. 전체 프로그램을 기획한 문화예술교육사님은 주 참여자가 신중년 세대라고 했다. 따라서 수업의 방향을 한국의 신중년 세대가 품고 있을 다양한 여름 풍경을 돌아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신중년 세대는 한국의 도시화를 몸소 경험한 50-60대를 의미한다. 한국의 도시화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으로 급격하게 진행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1955년 도시화율은 24.5%에 불과했으나, 꾸준히 상승하여 2018년에는 90.8%를 기록했다(링크). 한국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성장한 신중년 즉,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1974년 생)는 도시화율 변화 폭만큼이나 한국의 풍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자랐다. 그만큼 다채로운 여름 풍경을 기억하고 있을 신중년 참여자의 기억 속 여름을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선에서 비인간 동식물의 입장을 상상하는 시간이 되도록 수업을 구성했다.
첫 번째 만남은 기억 속 여름, 유년기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시간이었다. 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 여름 장면은 세 가지 색으로만 표현하기로 했다. 나는 참여하신 분들이 기억 속 여름 풍경을 떠올릴 수 있도록 몇 가지 구체적인 질문을 드렸다.
1. 나이: 여름 기억 속 당신은 몇 살인가요?
2. 장소: 어떤 장소에 있나요? 실내인지, 야외인지, 구체적인 지역은 어디인지 떠 올려 보세요.
3. 사람, 시간, 활동 :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시간대는 언제쯤이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4. 감정, 기후: 기억 속 여름 풍경의 분위기와 감정, 기후는 어떤가요?
5. 사물: 기억 속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이나 특별히 떠오르는 사물이 있나요?
6. 소리: 기억하는 장면에서 떠오르는 동식물의 소리나 생활음이 있나요?
참여자들은 나의 질문을 따라 눈을 감고 골똘히 기억에 묻혀있던 유년의 여름날을 꺼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에 더해 그 당시 풍경의 분위기나 시간대, 감정 등과 어울리는 세 가지 색깔을 뽑아냈다. 선택한 세 가지 색깔로 당시 풍경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식구들과 같이 나눠 먹었던 비빔밥, 물놀이하며 신이 났던 어린 날의 웃음소리, 마당에 펌프를 설치하고 처음 마중물을 넣어 물을 길어 올리던 여름날 풍경이 담겼다.
참여자들의 기억이 화지에 어느 정도 옮겨졌을 무렵, 나는 말풍선 모양의 종이를 나눠드리며 다음 활동을 안내했다.
나눠드린 말풍선을 오린 후 그림 속 여름 장면에서 들릴법한 소리를 적어주세요. 나무나 곤충, 새,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의성어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말풍선은 만화에서 그림의 빈 공간에 등장인물의 대사를 비롯해 콘텐츠의 시각적이지 않은 부분인 음성과 소리를 보여주는 시각화 방법이다. 말풍선에 담긴 대사는 서사를 이끌어가거나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이미지 너머의 상상력을 이끈다. 과거 여름 장면 위에 말풍선을 붙이는 활동은 이미지로 표현한 기억 너머의 비인간 생명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참여자들의 말풍선은 물, 풀, 바람, 새와 같은 자연을 비롯해 선풍기, 펌프, 젓가락 등 사물의 소리를 드러냈다. 말풍선에 드러난 소리 덕분에 비로소 기억 저편에 빛바랜 여름 풍경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활동 마무리에는 그림을 벽에 붙이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작품을 감상했다. 작품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자연과 공존해 온 이야기가 담겼다. 마중물을 넣고 팜프질을 하던 추억,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던 여름방학, 이름 모를 동물들의 합창으로 충만한 새 밤 풍경을 비롯해 여름 장마로 무서웠던 밤풍경까지. 자연의 일부로 자라온 참여자들의 추억 너머에 늘 함께해 온 비인간 생명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어른이 되어 경험한 여름을 떠올리며 보다 적극적으로 비인간 생명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회차보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사람의 이야기는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배경이라 생각되는 자연 또는 사물은 컬러로 표현하도록 안내했다. 참여자들이 떠올린 여름 이야기는 여름휴가나 업무 등 아주 일상적인 내용들이었다. 우리는 사소한 일과 중에도 공존하는 비인간의 시선에서 일상 풍경을 재해석하여 그림 한쪽에 비인간 존재의 생각을 적었다.
참여자들이 그린 그림 속 이야기의 주인공은 각자 자신이었지만, 글쓰기를 통해 화자가 고양이, 개미, 나무, 조개, 바람 등 비인간 생명으로 바뀌었다. 글을 쓰고 보니 그림 속 풍경이 달리 보였다. 한밤 중에 눈빛을 빛내는 고양이 가족의 시선은 동물이 인간의 관리를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만큼 능동적이었다. 작은 풀장에서 물텀벙을 치는 아기 목소리에 개미의 성실함은 더욱 빛났고, 매미는 물장구에 하모니를 맞추는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다. 휴가 중 배구를 즐기던 인간 가족의 소음으로 여름 오후의 여유를 빼앗긴 따개비 이웃의 고충도 엿볼 수 있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만들듯, 참여자들은 저마다의 기억 속 여름을 함께 보낸 비인간의 입장을 헤아렸다.
세 번째 날에는 밖으로 나가 자연과 직접 조우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형성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감각을 자연미술작품을 통해 시각화하기 위해서였다. 야외 활동에 앞서 자연미술(Nature Art) 작가 리처드 실링(Rechard Shilling)의 작품을 감상하며 활동의 방향성을 잡았다. 리처드 실링은 자연에 숨겨진 순환, 형태, 뉘앙스 등을 시각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그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창작과정에서 자연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참여자들은 일상 속 자연에서 균형과 패턴, 반복, 색 등 다채로운 조형요소를 발견한 작가의 시선에 감탄하며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도서관 주변의 자연물을 탐색하며 아름다움을 그러모았다. 나무껍질과 흙더미를 관찰하고 나뭇잎의 다채로운 색과 여러 모양으로 영근 열매를 채집했다. 채집한 자연물을 모아 이모저모로 형태를 만들고, 생각한 바를 적은 글을 함께 발표했다. 사소했던 일상 속 자연에서 발견한 각각의 시선이 반짝였다.
참여자들은 가까운 일상 속 자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상을 떠올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기뻐했다. 나 또한 짧은 산책길에 발견한 나뭇잎의 다채로움에 황홀했다. 특별히 도서관 입구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도블록의 미니어처로 보이는 은행잎 작품은 흥미로운 대화로 이어졌다. 이 날 작품 감상은 먼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사진을 관찰한 후 의미를 유추하고 작가의 의도를 듣는 순으로 진행했다. 이는 다양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선호하는 감상 방법인데, 은행잎 작품 또한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의미가 증폭됐다. 한 참여자는 작품을 보고 이렇게 유추했다.
보도블록처럼 놓인 은행잎을 보니 도서관에 들어오는 동물을 환영하는 문 같아요. 장애가 있거나 동물이어도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뜻밖의 해석에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은행잎을 모아 가을로 가는 길을 표현했다’는 창작자의 의도를 넘나드는 상상력이었다. 수업을 기획한 나의 기대보다 창의적으로 비인간과의 공존을 상상하고 서로의 상상에 호응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세 번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프로그램 세부 기획에 앞서 나는 유년기 여름방학에 놀러 갔던 외할머니 댁 마당 평상에 누워 매미 소리를 듣던 장면을 떠올렸다. 푸른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우리 동네 매미 소리와 달랐기 때문이다. 도시 어린이였던 나에게 시골 매미 소리의 발견은 신비한 비밀 같았다. 이 에피소드로 한동안 부모님과 수다를 떨었다. 귀여운 추억에 미소가 번지는 대화를 나누다, 도시화 이전 한국의 산하를 거닐며 자라온 두 분의 유년기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의 기억 속 수많은 나무와 꽃들의 이름, 그리고 풍부한 자연 속의 추억을 전해 들으며 의뢰받은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을 잡았다. 덕분에 나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듯 풍성한 시간을 보냈다.
민주적인 생태전환은 대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느리더라도 모두의 목소리가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저마다의 생태감수성이 자라는 과정을 경청하는 일. 그 일을 예술교육의 장에서 자주 만나기를 바라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참여한 모두의 여름 기억이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실험을 통해 세대 차이에도 예술은 인간에게 아로새겨진 생명을 사랑하는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대화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이 가능성을 또 누구와 나눠볼지 나는 오늘도 상상한다. (계속)
김근태기념도서관의 초청 및 운영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본 프로그램은 2023 서울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사 현장역량 강화 사업의 지원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강좌에 참여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주신 신중년 참여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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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윤지, 브런치북 - 예술로 맺은 우정, 05. 여름 기억 속 비인간 친구 만나기,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