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두 번째 장롱 서랍이었다. 그곳엔 우리 집 생활비가 있었다. 어머니는 돈을 꺼내기 좋게 봉투를 서랍 앞면에 끼워 두셨다. 살짝만 열어도 손가락을 넣어 봉투를 꺼낼 수 있었다. 봉투 입구는 항상 열려 있었고 지폐 끄트머리가 '나 만원이오.' 하고 삐죽 나와 있었다. 부모님은 종종 우리에게 거기에서 돈을 꺼내오라고 시키셨다. 가족 안에서는 비밀이 아니었고, 그곳은 공식 은행이었다.
유치원 인생에도 낙이 있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찾아 '내' 빨간 돼지저금통을 채우는 것이다. 이 녀석이 열심히 먹으면, 포만감은 내가 누렸다. 청소는 좋은 전략이었다. 빗자루를 들면 어디선가 동전이 나왔다.
"찰- 찰-"
동전 쌓이는 소리에 신이 났다. 식탁 위와 신발장 주변은 바다였다. 그 속의 진주들을 모아 들고는 부모님께 달려갔다.
'돼지저금통에 넣어도 되나요?'
눈빛을 보내면 미소로 답해주셨다. 그럼 거실 중앙에 턱 하니 앉아 숫자를 세며 돼지 밥을 주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천 원짜리도 나타났다. 돼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폐는 동그란 철통에 모으기 시작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다 먹은 쿠키 캔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시장에 갈 채비를 하던 어머니가 집을 나서려다 말고, 거기에서 만원 하나를 더 꺼내달라고 하셨다. 후다닥 가져다 드리니 '아무한테도 문 열어주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나가셨다. 나는 문을 잠갔고, 잠시 뒤 '철컹'하고 우리 집 대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난 안방으로 다가섰다. 살짝 열린 장롱 서랍 틈에는 하얀 봉투가 흔들-흔들- 손을 들고 있었다.
'갖고 싶다.'
딱 한 장이면 되었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다 빨간 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나를 보고 있지만 대담하게 봉투로 향했다. 삐죽 마중 나온 한 장을 빼내고, 서랍을 슬-슬-슬- 밀어 닫았다. 그리고는 발꿈치를 들고 불 꺼진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쿠키캔이 있었다. 내 보물상자 밑바닥에 초록색 그것을 깔았다. 이제 돼지 입단속만 시키면 될 일이었다.
"철컹-"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현관 앞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맞이했다. 가슴이 따끔거려 그녀의 장바구니만 보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인형을 들고 작은 방 문 앞에 앉아 놀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향한 그녀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장 본 것을 정리하러 진작 나왔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묘하게 내 심장소리가 커졌다.
"... 서랍이 좀 이상하네?"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한 장쯤이야'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 집의 총무였다. 생활비 잔고를 매일 체크하고 관리했다. 잔액이 맞지 않아 의아했을 것이다. 처음엔 본인이 착각했나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굳게 닫혀 있었던 장롱 서랍과 뭔가 달랐을 둘째 딸의 행동, 그리고 여자의 촉이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푸른 잎 한 장쯤 '내 것' 삼고 싶었다. 그것을 쓰지 않고 모을 계획이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가슴 찔리고, 무겁고, 어두운 일이었음에도. 안방에 있던 물건을 그냥 내 보물함에 옮긴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지만, 내 마음은 이미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경찰서에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가족들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어머니는 날 이미 나쁜 애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너를 믿어"
천천히 무릎을 디디고 눈을 맞춘 그녀는 화나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가 팔을 들어 나를 감싸 안으니 얼어버린 몸이 녹아내렸다. 나쁜 것들이 녹아 나갔다. 그녀는 이번 사건도 눈치챘지만, 동시에 나의 이런 행동이 처음이었다는 것도 알았던 것 같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이 제대로 통했다.
그때의 그녀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돈이 사라졌다'든지, '누가 훔쳤다'라든지, 그 현장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런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서랍이 좀 이상했고, 어머니가 나를 믿을 뿐이었다.
쿠키캔은 그녀에게 맡겼다.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자 보물상자를 파기했다. 그녀는 나를 처벌하지도, 수치심을 느끼게도 하지 않았지만 '완전한 비밀이 없음'과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게 했다. 그녀의 행동은 회초리보다 경멸의 눈빛보다 강한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믿음에 보답해야 했다. 그녀가 그랬듯이, 나 자신을 그런 아이로 정의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덕적인 면에서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이 일을 누구에게 말씀한 적이 없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아직,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머니는 지켜내셨다. 나와의 비밀도, 생활비가 든 서랍도, 그리고 어머니가 믿는 딸의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