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된 상태

다른 차원으로의 폭발적인 변화

어느 상담 치료사의 꿈


신부님이 나에게 달걀을 삶으라고 했다. 달걀은 병아리가 되기 직전 상태인 것 같다.

반숙으로 잘 삶아야 했다. 내가 삶고 나니 신부님이 확인을 한다.

신부님은 달걀을 이렇게 삶으면 어떡하냐면서 달걀 하나를 들어 흔드니 그 안에 있던 병아리 직전의 생명이 소리를 낸다. 내 귀 가까이에 가져올까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신부님이 귓가에서 달걀을 흔들어 그 소리를 듣게 되었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치료사의 이 꿈을 분석하면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이야기 중 이 꿈의 핵심은 달걀의 상태이다.

그 달걀을 분명히 삶았는데, 달걀 안에서 병아리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첩>의 개념은 양자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고전 물리학 VS 양자 물리학


나는 물리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문외한의 입장에서 물리학을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물리학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것 같다.

고전 물리학과 양자물리학!

고전 물리학은 거시 물리학이라면 양자 물리학은 미시 물리학이다.

고전 물리학은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 일어나는 일을 물리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면,

양자 물리학은 물질의 미세한 세계를 다룬다.

양자 물리학은 일종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고전 물리학은 근대적 사고를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라는 대상을 객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우주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 사물에 대해서도 객체로 접근한다.

근대적 사고로는 객체는 그 자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양자 물리학에서는 대상 사물이 보이는 것은 그 자체의 성질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 보기]에서 이런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바닷물이 왜 짜냐는 문제를 놓고 근대적 사고, 고전 물리학적으로 보면, 바닷물은 무기물이 많이 녹아 있어서 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그 물을 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 물리학의 관점으로 살짝 틀어 본 것이다.


"바닷물이 짜다는 설명은 물속에 어떤 물질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 물질을 왜 짜게 느끼는 것인지까지 더해져야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과학으로 세상 보기] 양형진, 굿모닝 미디어, 22)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빨주노초파남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근대적 사고의 결과이다.

관찰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무지개는 수백만 종류의 색깔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을 잇는 고전물리학에 속하는 물리학자이다.

양자물리학자들과 논쟁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이 제일 이해할 수 없었던 명제가 있었다.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달을 안 보고 있지만, 옆에 강아지가 달을 보고 있으면 달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양자물리학자는 이런 제안을 한다.


'지금 책상 위에 볼펜이 있는데,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이 볼펜이 책상 위에 있을 가능성과 없을 가능성 두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누군가가 살아 있는 고양이를 택배로 보낸 다면 받는 사람이 확인하기 전에 고양이는 두 가지 상태, 즉 살아 있는 상황과 죽어 있는 상황 등 두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양자 물리학자들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지?

맞는 말이다.

이런 명제가 이해가 된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제안을 하는 슈뢰딩거나 양자물리학자들도 자신들이 제시하는 제안을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은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양자물리학은 이해를 위한 학문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 즉 중첩 상태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고전 물리학의 입장을 고수하여 만든 컴퓨터는 0과 1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0과 1을 가지고 가장 탁월한 컴퓨터를 만든다고 해 봤자 슈퍼 컴퓨터, 슈퍼슈퍼 컴퓨터에 불과하다.


최근에 양자 컴퓨터가 만들어졌다고 하다.

양자 컴퓨터는 0과 1, 그리고 0과 1이 중첩된 상태 등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 결과 양자 컴퓨터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

기존의 최고 수준의 슈퍼 컴퓨터로 2년 동안 계산해야 하는 것을, 양자 컴퓨터는 불과 몇 초 안에 계산해 내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중첩된 상황에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중첩되어 살아간다.

엄마의 태중에서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를 만 9개월을 지낸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사람은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은 삶의 기력이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삶의 욕망을 포기하고 죽음의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죽음보다는 삶에 대한 욕망이 더 커서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때가 되면 삶의 욕망을 내려놓고 죽음의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안고 살아간다.

하루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삶과 죽음을 맛본다.

낮에는 삶의 욕망으로 넘쳐나지만, 밤이 되면 죽음의 욕망으로 잠을 추구한다.

사람은 엄마의 뱃속에서 9개월을 보냈듯이, 하루의 삶 속에서도 9시간을 잠을 자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루의 삶을 살면서도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100세의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놋뱀, 죽음과 생명의 중첩


요한 3:14에 예수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제시하신 두 가지 표적 중 하나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불평한 자들을 물려 죽게 만들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나가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불뱀이 떠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게 하면 살 것'이라고 하신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그것을 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선포했다.

불뱀을 매단 것이 아니라, 놋뱀으로 만들어 매달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놋뱀은 죽음을 가져온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불뱀과 생명의 살리는 표징이 중첩되어 있다.


십자가의 여러 가지 중첩

십자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 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과 공의는 서로 모순된 개념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두 가지 속성을 순차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순된 하나님의 속성(사랑과 공의)은 십자가에서 중첩된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이 중첩된다.


또한 강함과 약함이 중첩된다.

사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권세는 사망권세이다.

이렇게 강력한 권세를 이기기 위해 예수는 더 강한 권세를 가져오지 않았다.

가장 연약하심으로 가장 강력한 사망권세를 이기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저주와 복이 중첩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무 위에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오른 자는 모두 저주받은 자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저주받는 자가 오르는 나무에 오를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복과 저주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예수가 나무 위에 오르신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십자가가 지닌 이러한 중첩의 의미를 아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엄청난 복을 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삶도 중첩 투성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시에 아기를 미워한다.

어떤 어머니는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나의 아기에게 주다가 어느 순간 억울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 그 어머니는 아기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고 한다.


아기 역시 어머니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

아기는 젖을 잘 주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이유기(9개월)가 되어 젖을 끊는 어머니를 미워한다.


이처럼 어머니나 아기나 서로를 한편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 미워하는 것은 부모-자녀라는 관계를 유지해 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변증법이다.


사랑하는 연인은 사랑만 하다가 미움이 싹트는 순간 벌써 헤어질 생각을 한다.

연애를 할 때는 사랑만 하지만 결혼을 하면 부부는 사랑과 미움이 중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연애 시에 사랑만 하던 때와는 달리 사랑과 미움이 중첩되는 결혼생활을 통해 삶의 의미는 증폭된다.


각방 쓰는 부부 vs 한 방에서 자는 부부


중년기가 되면 부부관계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각방을 쓰는 부부와 한 방에서 함께 자는 부부, 이 두 종류의 부부가 있다.

각방을 쓰는 부부는 사랑과 미움의 중첩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부부간에 갈등을 겪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방을 쓰는 순간부터 배우자에 대한 어떤 기대도 소망과 관계 개선도 바라지 않고 서서히 남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죽을 때는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진다.

이러한 부부간의 이별은 사랑과 미움의 중첩상태를 허용하지 않고, 사랑과 미움의 이분법으로 사는 부부에게 마땅히 찾아오는 저주다.


그러나 중년기가 되어도 여전히 한 방을 쓰는 부부는 서로 갈등을 겪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부부이다.

한 방 쓰는 모든 부부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각방 쓰는 부부와 비교하면 그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부부간에 해결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결혼의 의미를 찾고자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애를 쓰고 있는 부부이다.

중년의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사랑과 미움이라는 중첩된 상태를 겪어내는 부부는 위대하다.

그들은 자녀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사랑과 미움의 중첩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4년째 심리치료를 해 오다 보니 내 나름대로 하나의 명언을 만들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그 명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 절대 가까이 지내지 말라"


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사랑과 미움의 중첩 상태'를 겪어내면서까지 관계의 희로애락의 과정을 통과해 낼 수는 없다.


벌써 30대만 되어도 최근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유럽 여행을 열흘 정도 함께 다녀오다 보면, 돌아올 때는 거의 대부분 원수가 되어서 돌아와 다시는 보고 싶지 않게 된다.

20대의 나이를 넘어서면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사랑과 미움의 중첩상태를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일단 30대가 넘어가면, 좋은 사람을 새롭게 만나면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리를 둬야 한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음식점과도 같다.

음식점 주인 입장에서 보면, 내가 만드는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매일 먹으러 오는 손님은 얼마 간 맛있게 잘 먹다가 금방 질려서 다시 안 올 손님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이나 열흘에 한번 와서 맛있게 먹고 가는 손님은 앞으로도 계속 올 수 있는 단골로 자리 잡아갈 것이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솜씨가 들어가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수성찬이 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겪어 온 여러 가지 감정들의 중첩이 베어 들었기 때문이다.



꿈 주인의 중첩 상태


50대 초반의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꿈 주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꿈을 꿨다.

계란은 삶아서 이미 죽은 상태와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중첩 상태는 뭔가 다른 차원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해 갈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 폭발성은 꿈 주인공의 비명으로 나타난다.

비명은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0과 1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0과 1, 그리고 그 둘이 중첩된 상황으로 삶이 이끌어질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의 그녀의 비명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적인 비명이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차원으로 너무 풍성하게 다가와 깜짝 놀라는 비명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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