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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일상적 삶 속에서 <양자도약>

호피 인디언들의 우주관

호피 인디언은 애리조나 주 북동부에 위치한 호피 인디언 부족으로, 푸에블로(Pueblo) 문화권에 속한다.

그들은 고대 푸에블로 문화를 이어받았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적인 공동체이다.

호피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약 4,000년 전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형성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호피인디언은 오랜 세월 동안 애리조나의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들은 고유한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시공과 우리 인간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디바인 메트릭스], 그렉 브레이든, 215)


라고 말한다.


몸과 자연, 우주, 신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삶을 통해 우주를 관찰하고 있는 <우주 관찰자>이다.

내가 보기에 우주와 우리 사이에는 그러한 <평행 현실 parallel reality>가 존재하는 것을 명백하다.


단지 이것은 나와 멀리 있는 우주 사이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철학자에게 질문한다,


"우리 뇌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이 질문을 뇌과학자에게 물으면 인간의 뇌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장면이 당신의 뇌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곧 내 몸 안에 있는 것이다.

내 몸 안에 없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또는 의심하지 아니하고 받으리라 하면 받으리라."(마태 21:22)


하나님의 응답은 이미 내 몸 안에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내 삶에서 실현되도록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53b~c)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자들은 돌고 있으며 그 운동은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만약 그 운동이 멈춘다면, 우리가 관찰하는 별들도 그들의 정지상태에서 더 이상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운동이 멈춘다면, 더 이상 우리는 계절의 변화나 천문 현상의 예측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돌 안에 전자가 돌고 있는 이유는, 저 하늘에 별이 돌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플라톤의 그러한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지해 준다.


"자연의 공통 법칙은 작은 것에도 큰 것에도 적용된다" (1098b)


두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몸과 우주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지만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로서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 삶, 인생, 이웃, 자연, 우주, 신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사에서 겪는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일어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들이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양자물리학에서 <양자도약>이라는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양자도약

"호피 인디언에게 시간은 사라지고, 공간은 변형된다. 그리하여 서구인이 직관적으로 믿거나 뉴턴 물리학에서 말하는 균질하고도 동시적인, 시간이 없는 공간은 호피 인디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Lanugage, Thought, and Reality], Benjamin Lee Whorf, 58-59, [디바인 메트릭스]에서 재인용, 216)


세상에는 균질적, 또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같은 디지털 시대에 합리적이고 계산이 딱딱 들어맞지 않고 현실초월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성경의 이야기를 해 보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문이 열지 않고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나타나셨다(요한 20:19).

양자도약은 양자역학에서 양자 물체가 물리적인 장벽을 통과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벽을 뚫고 들어 온 방식은 양자도약의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와 과학이 잘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것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시대에 맞게 기존의 컴퓨터와 양자 컴퓨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양자컴퓨터의 0과 1의 중첩상태는 양자도약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우연이었던 일은, 0과 1이 중첩되는 양자물리학적 세계에서는 우연이 필연으로 바뀔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시간 너머에서 온 메시지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는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작은 기적들 - 일상의 특별한 우연](Yitta Halberstam, Judith Leventhal 공저)에는 용서의 힘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대교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19세에 아버지를 떠난 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아들의 그런 반항은 매우 모욕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종교적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어느 날 조이는 한 친구에게서 아버지 사망소식을 듣는다.

그때야 자신의 혈통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가문의 뿌리가 시작된 이스라엘로 순례를 떠났다.

조이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 섰다.

조이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가족에게 고통을 끼쳐 정말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썼고 전통에 따라 벽돌 사이 틈새에 편지를 끼워 넣으려고 했다.

편지를 끼워 넣을 적절한 자리를 찾아 맞는 틈새를 찾았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조이가 틈새에 편지를 넣는데 거기 원래 끼어있던 종이가 별안간 떨어지더니 그의 발치에 안착했다.

그 종이를 제자리에 끼워놓기 위해 돌돌 말린 그 종이를 집는 순간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이는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익숙한 필체였다.

바로 아버지의 필체였던 것이다.

그 종이에는 아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제발 아들을 용서해 달라는 아버지의 기도문이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같은 벽돌 틈새에 기도문을 꽂았고, 그 기도문은 조이가 올 때까지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디바인 메트릭스]에서 재인용, 207~209)

시간과 공간의 우연성을 넘어 필연성으로 다가오는 이런 경우야 말로 우리 일상에서 기묘하게 일어날 수 있는 <양자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신앙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본다.

바꿔 말하자면, 신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 <양자도약>이라는 양자물리학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이 다.

그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는 명제는 틀렸다.

우주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고 하지만, 때로는 <양자 도약>를 하며 불확정성 원리를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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