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와 동사 사이
어떤 서울대학교 학생이 자살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서울대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여겼다.
오랜 힘겨운 경쟁을 거쳐 겨우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천국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고, 나보다 머리 좋고, 우리 집보다 월등한 조건을 가진 가문의 자녀들이 득실대는 곳이었다.
그들은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태생부터 달랐다.
그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평생을 따라잡아도 발꿈치의 떼만큼도 미치기 힘든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적어도 은수저는 될 수 있었고, 은수저는 조금만 노력하면 금수저를 따라잡을 수도 있었다.
그는 왜 자살을 선택했나?
그는 자기 삶에 대해 긍정하고 싶었으나, 자신은 많은 문제들 때문에 도무지 삶을 긍정할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흙수저라 인식한 것은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긍정할만한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인도덕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도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의 조건에 따라 삶을 살기 위한 헌신을 필요로 한다.
주인도덕의 한 측면은 외부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사상이다.
좋게 말하면, 이는 자신의 가정 형편이나 부모의 경제적 여건이 가난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천년 이전에는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게 자라서 인생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며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계가 그들을 정의하거나 잠재력을 제한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피해자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그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 즉 사고방식과 행동에 집중하기로 선택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은 다른 사람의 처벌이나 거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이다.
노예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인생이 불공평하고 부당하며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보다는 외부 조건이 자신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둔다.
주인도덕의 삶을 살기로 선택하는 것은 힘을 얻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주관하고, 자신의 생명이 소중함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도덕을 가진 사람은 외부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산다.
결론적으로 주인도덕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선택이며, 용기와 의지와 헌신이 필요한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외부 환경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가 설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이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주인의 도리를 가지고 살며 자기 운명을 주인으로 삼아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태도를 가진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의롭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 종교인들 중에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절대적인 그림자를 뒤로 안고 살아가지만, 그 그림자를 절대 보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극도의 나르시스트에 해당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속이거나, 무시한다.
이러한 행동은 상호 존중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며,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
독재자, 재벌가 막내 아들, 천재, 너무 큰 상처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무시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려는 사람 등이 이러한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을 소유한 자들에 해당한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약자나 무능력자, 결핍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를 거스르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약자들에 대해 '갑질'에 해당하는 행동은 서슴치 않고 한다.
상대방이 약자인 경우 그들의 인격과 권리를 무시하며, 상호 존중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깨뜨린다.
부정적인 주인도덕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무시하며, 이는 상호 존중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위반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며, 이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적 주인도덕을 가지기 위해서는 상호 존중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존중하며,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약자나 무능력자, 결핍자에 대한 이유 없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배려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상호 존중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 처음부터 주인도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유를 하지 않고 자신을 긍정한다.
이들은 금수저로 태어나 큰 힘들이지 않고 이것저것을 탁월하게 해내는 능력을 마치 자신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긴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재능은 별 노력 없이 발휘하는 것이기에 진정으로 자신의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타고난 재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기간 동안에는 땀의 지불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독재자, 재벌집 막내아들, 천재 등은 약자, 무능력자, 결핍자에 대한 사유 없이 그들의 존재를 거스르면서 자신의 잘못된 욕망을 실현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다.
노예도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한감정에 대한 반성이나 사유가 없으면 노예도덕의 범주에 해당하는 행실을 일평생 반복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격 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삶이나 인격의 성숙에 대한 아무런 욕망 없이 살아가며, 반복된 원한감정을 낱낱이 기억하면서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중한다.
성숙하고자 하는 존재 욕망을 가진 사람은 반성적 사고를 가지고 사유를 한다.
주인도덕을 가진 사람은 주어와 동사 사이에 간격이 없다.
그 말은 주어(주체)는 사유하지 않고 행동부터 먼저 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는 배가 고플 때, 눈앞에 보이는 사슴을 잡아먹을까 말까를 사유하지 않는다.
사슴을 잡아먹어야 되겠다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지도 않는다.
사슴을 반드시 잡아먹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다지거나, 목표를 세우거나, 도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냥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으려고 그냥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사자는 사슴을 사냥하는 일에 있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다.
사슴을 잡아먹는 행위를 하는 주체 자체가 사자인 것이다.
그러나 막다른 궁지에 몰린 사슴이 순순히 자기 목숨을 내어 주지 않고, 사자와 맞서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사슴은 사자와 맞서기 위해 많은 사유를 해야한다.
즉 사슴에게는 주어(주체)와 동사(행동)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지는 것이다.
사슴이 죽기를 각오하고 사자를 물어뜯기 위해서는 온몸이 사유를 해야 한다.
온몸이 떨리고, 분노와 슬픔이 섞여 죽음을 각오하는 의지를 작동하여 승산 없는 공격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도덕의 취약함이며, 그때 발휘되는 감정은 <원한 감정>이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주인도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김정은이다.
공식석상에서 그는 사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하는 사람이고, 현장에서는 지도하는 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지시하고 지도한다.
그는 그 지시나 지도가 잘 되었건 잘못되었건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지시와 지도를 할 뿐이다.
사유는 노예도덕을 따르는 아랫사람들이 한다.
김일성이 주석 시절 북한 고유의 농법을 개발하여 지시하였다.
그것은 산을 깎아서 농지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보통 다른 고랭지 농업의 경우 아무리 산이 가파르다 해도 평평하게 밭을 만들어 물을 고이게 하여 계단식으로 정비하면서 밭을 개간하는데, '김일성 농법'이라 하여 산이 가파른 그대로 개간하여 채소를 심으니 비가 한번 왔다 하면 자라던 작물이 그냥 비에 쓸려 내려가고 만다.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도 주인은 사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아랫사람들의 사유가 깊어질 뿐이다.
그런데 노예도덕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주어보다 동사가 먼저 과도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존재(주체, 주어) 보다 더 큰 행동(과대적인 동사)을 하면 주체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자기도 모르게 의로운 행동, 또는 과도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 평소의 동사의 중력 이상으로 작동하게 됨으로써 문장의 균형을 위해 주어도 함께 흔들어서 주어의 중력을 부풀리도록 자극을 주면 또한 몸이 흥분되어 떨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주인은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는 주인의 미덕이 아니다. 그 결과 극도의 나르시시즘으로 갈 수도 있다.
주인도덕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주인이 자기를 보지 못하면,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 자신이 노예가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거론한다.
그 변증법은 사유하지 않는 주인은 나중에 자기 노예의 노예가 되고, 사유하는 노예는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의 글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언급하면서, 노예도덕에서 어떻게 주인도덕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를 서술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