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유언, "내게는 제자가 없다"

내면의 자기 진리를 찾아라

진정한 제자는 스승을 창조하는 자이다


"I have had no regular disciples." (내게는 제자가 없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34a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스승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늘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초기 편, 중기 편, 후기 편으로 나뉜다.

초기, 중기, 후기로 넘어가면서 그때마다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다르다.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현실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플라톤이 현실에서 경험한 소크라테스도 아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현실에서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기록한 말도 아니다.

플라톤의 저작 속의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발명한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빌어 자신이 발명한 소크라테스가 말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소크라테스와 무관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제자임에 틀림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안에 내면화되어 플라톤이 성장 발달하는 과정에서 내면화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안에서 계속 발달해 가는 것이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적 아이디어와 주장을 표현하기 위한 페르소나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내게는 제자가 없다"라고 한 말은 새겨 들어야 한다.

이것은 그에게 실제로 제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가르침과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제자들이 와서 배울 수 있는 정식 학교나 기관이 없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과의 비공식적인 철학적 대화에 의존했으며 종종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유명한 소크라테스식 질문 방법에 참여했다.

소크라테스는 추종자를 찾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지혜는 자기 발견과 자기 지식을 통해 온다고 믿었던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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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정규 제자가 없다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철학에 대한 그의 영향은 광범위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추종하는 자들을 제자를 키운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스터(master)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내게는 제자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의 참 뜻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가르침을 내면화한 플라톤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전통적인 형태의 가르침과 배움이 아닌 철학적 대화와 개인의 자기 발견의 힘을 믿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인물은 실제 소크라테스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수 있지만 확실히 철학의 세계에서 그의 유산을 공고히 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자신의 내면 안에서 자기 스승을 창조했다.


최면을 포기한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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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한때 프랑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샤르코(Jean-Martin Charcot) 박사를 추종했다.

19세기 후반에 최면을 사용한 치료법으로 유명했으며, 프로이트가 샤르코 박사의 도움을 받아 최면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샤르코 박사는 히스테리 환자를 최면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과정에서 신기한 장면들을 많이 연출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최면 치료법에 대해 조금씩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후에는 자신의 치료 방법으로 최면 대신 정신 분석을 사용하게 된다.

지금은 심리치료로써 최면의 방법론이 NLP라는 형태로 많은 변형을 가져왔다.

프로이트 당시의 방법이 최면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환자에 대한 엄청난 인격 침범을 일으킬 수 있다.

최면술사가 환자의 정신을 전능하게 통제하게 되고, 최면술사가 심어 놓은 주문이 환자에게는 강력한 초자아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 주문이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레몬즙과 같은 신 것을 못 먹는 사람이 최면의 주문에 의해 단 것으로 자각하여 신 것을 단맛으로 알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언젠가는 주문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고, 그 주문이 풀리는 순간 그는 다시 신 것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개인은 정신적, 심리적으로 아무런 발달이나 개선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개인 안에 타자의 초자아를 심어 놓고, 그 초자아에 의해 조종받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속이는 것이다.


클라인의 환자에 대한 인격적 존중


이에 비해 멜라니 클라인이 환자를 대하는 중에 분석가의 초연한 태도를 강조한다.

클라인은 분석가로서 환자 안에서 완전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된 분석가의 반응, 그것은 무엇이든 그 진리를 견디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클라인의 분석가로서의 자세는 환자의 상황에 일일이 해석해 주지 않고 해석을 자제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분석가가 환자가 스스로 자신과 관련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 진리를 견디는 능력>이란 내담자의 입에 달콤한 해석을 쑥쑥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발견하기를 기다려 주는 분석가의 태도이다.

분석가는 환자의 마음의 작용을 존중하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환자의 상황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고 환자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해석을 자제할 수 있는 중립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분석가는 내담자의 정신작용을 존중하고, 내담자가 내면 변화의 흐름으로 스스로를 인식해 가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사회적인 '무엇'에 초점을 맞춰 사느라, 갖가지 증상과 병리에 시달리게 된다.

클라인 같은 분석가가 원하는 것은 그런 병리를 얻게 된 사회적 자아가 더 이상 '무엇'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자기 발견으로서 발달이다.

이러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분석가는 환자의 마음의 작용을 존중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환자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 충동이나 편견을 인식하고 피하는 것이 포함된다.

분석가는 자신의 신념이나 성향을 환자에게 강요하려는 충동을 억제하여 환자가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클라인이 강조하는 중립성은 환자가 자기 인식을 높이기 위한 여정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의 나됨이라는 동어반복적 진리


소크라테스나 멜라니 클라인이나 스스로에게는 진리 발견자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진리의 매개자일 뿐 진리 제작자가 아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담자의 자기 지식을 전달하는 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 있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자세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고 할지라도 그가 가르쳐서 제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외양인 what에 관한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스스로 깨우친 진리를 제자에게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교사의 입에서 떠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진리의 외양인 그 무엇(what)이 될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명언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자신에게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크게 깨닫게 된 진리를 전하였지만, 그것이 타자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의 입을 벗어나는 순간, 진리값은 헐값이 되어 더 이상 진리가 되지 못한다.

그의 말을 듣는 것 자체를 진리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 명제를 가지고 자신을 들여다봤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진리를 획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타자에게 그 명제를 전하는 순간, 그 명제는 '누구'를 위한 진리가 되지 못하고, '무엇'이라는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명제를 듣고, 자신의 내면에 그 명제의 씨가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내고 잎사귀와 열매를 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듣고, '내가 누구인가?'를 내면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 때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지식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도록 돕는 사람에 불과하다.

이것이 자기 진리이다.

외부에서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넣어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진리가 되지 못한다.

나의 나됨을 발견하는 것.

내가 나의 나됨을 발견하고, 그것이 나임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것이 왜 진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동어 반복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나됨을 발견하는 것'

'내가 나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은 바로 동어 반복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동어 반복이다.

신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I am who I am.


신은 동어 반복의 존재이다.

내가 신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것은 동어반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나 지식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서 나오는 나의 존재에 관한 앎이다.

나의 자아(ego)는 외부의 정보나 지식을 획득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지만,

나의 자기(self)는 나의 나됨, 고유한 나를 찾는 데에 힘쓴다.

나의 자기는 곧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나됨이라는 동어반복적 존재이다.

나는 곧 하나님의 삶을 내가 살아가는 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제자가 될 수 없고,

나는 누구를 내 제자로 삼아서도 안 된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마스터(master)로 살아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그가 자신이 스스로 마스터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신이 내가 되셨다는 사실만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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