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향연]5: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플라톤이 [향연]에서 제시하는 <남녀 사랑의 본질>

플라톤의 [향연]은 에로스에 관한 주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는 책으로서는 단연 최고의 고전이다.

플라톤은 대화편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에로스를 소년애(동성애) 관계에서 적용하는 당시 사회적 통념을 깨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적용해야 할 주제로 전환시켰다.

이것은 대단한 변혁이다.

당시 소년 동성애는 존경받는 어른이 소년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제도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로스의 적용대상을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여성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을 당연시했던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남자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anima)을 어느 여성에게 투사를 해야 사랑이 이루어지고 연인관계가 성립된다.

그런데 플라톤 당시, 남자는 여자를 인격체로 간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엘리트 지도자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여자처럼 아름다운 소년에게 투사하여 동성애적 신체접촉을 통해 지식을 전수할 수 있다는 교육론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에로스의 상호성을 남자성인과 소년이 아닌,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은 국가의 교육제도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을 씌워 독배를 자초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피흘림을 동반한 순교(?)는 과연 당시 그리스 사회의 교육과 사랑과 관련된 문화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을까?

역사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나는 소크라테스의 순교정신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죄악에 대해 고발한 데서 증명된다.

바울은 이단, 도덕적 태만, 신앙심 약화, 성적 부도덕 등 고린도 교인들의 삶 전반에 걸친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바울은 특히 부모와 자식 간에 일어나는 근친상간에 대한 성적 부도덕에 대해 심도있게 고발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오히려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고발할 때, 특별히 동성애에 대한 경고 수위를 높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피를 동반한 순교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노력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에로스를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으로 확정 짓게 만들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사랑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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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계단'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대화 [향연] 211c에서 여사제 디오티마가 제시하는 용어이다.

디오테마는 이 개념을 통해 사랑의 여러 단계를 설명하고, 그것이 높은 아름다움과 지혜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임을 설명한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사랑의 계단은 다음의 다섯 단계로 제시된다.


1.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계단: 첫 번째 단계는 사랑의 객체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단계

이다. 이 단계에서는 대개 신체적인 아름다움이 사랑의 객체로 느껴진다.


2.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계단: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신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인 아름다움

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3. 아름다움의 형식을 사랑하는 계단: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름다움의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 이 형식은

실존하는 모든 아름다움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이 형식을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4. 지식을 사랑하는 계단: 네 번째 단계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지식을 추구하게 된다.


5.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해하고 참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계단: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아름다움의 본질.

을 이해하고, 이를 향한 사랑이 최상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사람은 사랑의 객체를 향한 사랑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발전하며, 결국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과 지식, 혹은 참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erastes)와 사랑받는 자(eramenos)


<사랑의 계단>의 다섯 계단 중, 첫 번째 계단에서 네 번째 계단까지는 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이다.

다섯 번째 계단은 지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오직 사랑받는 자를 통해서 발견되지만,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상에 있는 이데아로서 오직 사랑받는 자를 통해서 이 땅에 임재하여 그것을 욕망하는 자, 즉 사랑하는 자만이 가져갈 수 있다.

그래서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기이하고 오묘한 작용에 대해 플라톤은 [파이드로스 Phaidros] 249e~250a에서 보여준다.

거기서 플라톤은 이 기이하고 오묘한 작용을 <광기>라고 표현한다.([파이드로스], 249e)

플라톤은 이 광기는 곧 <신들림>이라고 말한다. ([파이드로스] 상동)

즉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받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자이다.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주는 자이다.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줄 수 있는 자이다.


성직자와 성도의 관계

교회의 예배 중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시간이 언제인가?

개신교 성도들은 대부분 '설교'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봉독> 시간이다.

예배 중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은 설교시간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이다.

설교는 타락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거룩하고 신성한 말씀을 인간화하고 세속화하는 시간이다.

설교는 진리를 대변할 뿐,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성직자는 하나님을 대변할 뿐 결코 신이 아니다.

그러나 성도는 설교를 통해 진리를 세속적인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 나간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더 좋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옮기기도 한다.

성도가 목회자를 존경하는 근거는 목회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 역시 성도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

[향연]의 관점에서 보면, 성도는 사랑하는 자가 되고, 성직자는사랑 받는 자가 된다.

목회자가 사랑받는 자가 되는 이유는 목회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진리를 성도들에게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목회자보다 훌륭한 설교를 한다고 해서 진리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성숙한 성도는 평범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참된 음성을 듣고, 참된 진리를 받는다.

성직자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남보다 더큰 목회를 한다고 해서 다른 성직자보다 더 큰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우상화하여 파멸의 길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진정으로 욕망하는 '사랑하는 자'(성도)는 평범한 '사랑받는 자'(성직자)의 보잘 것 없는 설교를 통해도 얼마든지 사랑받는 자가 갖고 있지 않는 진리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다.


상담실에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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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Jaque Lacan)은 세미나 8의 {전이 Transference}에서 플라톤의 [향연]을 해석해 나간다.

라캉은 [향연]에서 사랑과 욕망이라는 에로스의 두 얼굴을 발견하면서,


"사랑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


이라 대목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라캉은 상담실에서 환자와 분석가의 관계를 '사랑하는 주체'(환자)와 '사랑받는 주체'(분석가)로 나눈다.

분석 상황에서, 각자 결여를 가지고 있는 두 주체는 완벽한 지식을 가진 '대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사랑하는 자(환자)는 사랑받는 자(분석가)의 관계가 성립되면서 에로스가 작용하게 되면, 환자는 분석가에게서 분석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지식들을 가져오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분석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까지 가져오게 된다.


분석가는 환자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면서, 분석가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까지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무능한 목회자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진리를 성도에게 줄 수 있듯이, 아무리 무능한 상담자라 할지라도 일단 상담자의 위치에 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타자'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되는 것이다.

환자의 낫고자 하는 욕망이 큰 만큼 상담자에게서 상담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많이 가지고 간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연인 간의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남자는 사랑하는 자요 여자는 사랑받는 자다.

사랑하는 남자는 미인을 사랑하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이러한 열망과 감정을 통해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의 내면을 알아가고, 이를 통해 더욱 깊은 사랑과 이해를 느끼게 된다.


사랑받는 여자는 이러한 남자의 열망과 사랑을 받으며, 그에게 대한 자신의 미인과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강화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더욱 깊은 감정을 느끼고 그에게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플라톤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보다도 더욱 불안정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받는 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재능 등 외적인 요인에 의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정성이 있다.

따라서 사랑받는 자는 항상 자신의 외적인 가치에 대한 불안정성을 느끼게 되며, 이는 자기 개념의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은 남자가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이상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관계가 역전되면...

그렇지만 플라톤은 남자가 사랑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사랑받는 자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고 우려한다.

남자가 사랑받는 자가 되면, 그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려는 욕구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욕구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자신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지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자가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있을 때, 여자가 남자로부터 한번 사랑받은 적이 있으면, 그때의 사랑을 기억하며 남자가 다시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과거 우리나라 여자들은 대개 그렇게 살았다.

남편이 외도를 해도 꾹 참으면서 끝까지 기다렸다.

지금 사랑하는 자가 사랑해 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사랑해 주겠지' 독백하면서 한없이 기다린다.


요즘은 여자도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남자를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두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두드러지면서 사랑하는 자의 위치에 있는 여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 결과 그런 위치에 있는 여자는 남자의 변심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쉽게 이혼하고 만다.


어떤 여자는 3년간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1년이 지나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는 사유를 묻자, 여자가


"너하고는 더 이상 떨림이 없어졌어."


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남편이 "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그랬더니, 아내는 이혼서류에 사유를 하나 더 추가했다.


"자살 협박"


그들은 결국은 헤어졌고, 여자는 떨림을 주는 5살 연하의 남자와 재혼하였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가 역전되자 수천 년 역사를 거치면서 유지되어 온 결혼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부관계에서의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아내가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그만큼 그 가정은 안전하다.


1985년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 이후 남북간 이산가족 상봉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40년, 50년 만에 만난 부부를 보면, 대개 남자들은 대부분 다시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지만, 여자들 중에는 남편을 잊지 못하고 한없이 기다리며 독수공방한 경우가 많았다.


어떤 할머니는 신혼 초에 전쟁터에 끌려 나간 신랑을 일평생 그 긴 세월을 기다렸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샘터]라는 잡지에서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에베레스트 산, 어느 기슭에 80세가량의 할머니가 봄이 되자 눈이 녹아내리는 물에 떠내려 오는 젊은 남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으로 에베레스트등반을 하던 중, 남편이 실족하여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남편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산기슭에 집을 짓고 50여 년의 세월을 기다리는 중에 바로 그날,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죽은 남편을 잊고 보다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남편의 시신을 찾는 데에 일생을 보낸 이야기이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남편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는 자>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을 받은 적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것을 절대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가가 외도하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힘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여자는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줄 수 있다


남자가 보기에 여자는 참으로 아름답다.

남자가 여자에게 반할 때는 정상적인 판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는 위([파이드로스)에서 말한 광기의 상태이자, 신들림에서 오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남자는 마치 그녀가 여신인 듯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 안에서 미의 이데아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상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일수록 미의 이데아를 많이 분여 받은 것이다.

남자의 눈에 그 이데아가 그 여자를 여신처럼 보게 되는 동기가 된다.


남자에게는 이런 면이 없다.

오직 여자에게만 있다.

아내가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있을 때, 사랑하는 자인 남편은 아내의 현실을 넘어서는 이데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모든 남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남편이 현명하다는 뜻이다.

그런 남편은 아내라는 여자 안에 있는 숭고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숭고미도 이데아 실재도 없다.

사랑하는 자(남편)가 사랑받는 자(아내)에게 헌신하고, 내적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사랑받는 자는 자신도 모르는 이데아, 즉 숭고미를 발굴하게 된다.


이 숭고미는 남자에게는 없다.

여자 안에만 있다.

여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천상의 이데아, 숭고미이다.

이것도 남자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헌신하지 않으면, 절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받는 자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


[향연]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미모와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사랑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사랑의 열망을 통해,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앞에 있는 미인을 초월하여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탐구를 통해 인간이 영적인 이상을 향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를 통해 아름다움과 진리를 탐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여자가 사랑하는 자가 되었을 때, 여자가 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가진 것 밖에 줄 수 없다.

그러나 여자가 사랑받는 자로서 본연의 위치에 있으면,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부부간 관계상승이 일어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으로, 아름다움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가운데 더욱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쁨이다.

그때 남편은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내는 사랑 받는 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인정받으면서 자아를 발전시키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남자의 여성성과 여자의 여성성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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