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향연]7: 에로스의 현실 적용적 의미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

(이글은 [향연]6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력 포인트가 갈등의 포인트



연애를 할 때 상대방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매력포인트가 결혼 후에는 갈등의 포인트가 된다.

연애할 때는 바로 그것 때문에 좋아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싸우기 시작하고, 바로 그 문제가 이혼의 사유가 된다.


연애할 때 상대방의 어느 포인트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오직 저 사람만이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구나'하는 무의식적 자각의 발로다.

그래서 자신의 결핍의 수준만큼 상대방을 그에 걸맞는 수위에서 욕망한다.


연애할 때 열렬하게 시작된 로맨틱 러브는 결혼 후 3년이면 끝난다.

그때부터 부부 사이에 현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현실이란 그동안의 과도한 욕망의 거품이 꺼지고, 결핍의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부부는 그때야 비로소 서로를 욕망했던 것이 곧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결핍은 각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채워왔던 것이다.

부부간 나르시시즘은 감춰진 결핍을 다 드러내는 투명한 호수처럼 된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의 두 얼굴이자, 동시에 결혼의 양면성이다.

그래서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는 말이 나온다.

결혼은 후회하느냐 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결핍과 욕망의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부부는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과 거지 여신과의 만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결핍과 욕망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결핍과 욕망이 교차하는 것은 아니다.

안더스 니그렌은 사랑에는 두 가지 사랑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곧 <아가페>와 <에로스>([아가페와 에로스], 179)다.


아가페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신이 인간에게 우주에, 자연에, 그리고 물질에 대해 베푸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우주가 조화롭게 운행되는 섭리가 아가페이고,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형태로 유지되어가게 만드는 것 또한 아가페이다.

그리고 모든 동식물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해 가는 것도 하나님의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신이 피조물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가페는 사랑으로서 실체를 가지고 있다.

아가페는 사랑 그 자체(per se)이다.


요한 1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아가페로서 하나님의 실체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

아가페는 위에서 내려오는 '내리사랑'이다.

아가페를 가진 주체가 아가페를 받을 만한 대상을 만나면 아무리 줘도 아깝지 않다.

왜냐하면 아가페는 실체이기에 끊임없이 생산되는 사랑이기때문이다.


에로스는 없는 것을 주는 것이기에 주는 만큼 텅비워져 간다.

그러나 아가페는 있는 것을 주는 것이며, 늘 흘러나와 넘치는 것을 준다.

에로스는 주는 만큼 되받아야 다시 채워지지만, 아가페는 줘도 줘도 끝없이 솟아난다.

어머니의 모성적 사랑은 신적 사랑을 닮아 아가페와 같다.

아가페는 무조건적 사랑으로 아무리 퍼줘도 억울함이 없으며,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녀는 엄마의 따뜻한 모성적 사랑을 통해 신적 사랑을 받는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에서 흘러 나오는 초월적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에로스는 사랑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랑은 실체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에로스는 사랑을 주는 만큼 텅비워져 간다.

욕망의 대상이 나타나면 자극되는 욕망의 수위에 맞춰 에로스를끌어올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만큼 그의 내면은 텅비워져 간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글([향연]6)에서 언급했듯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과 거지 여신과의 결합에서 나온 존재이기 때문에 결핍과 욕망 사이를 오가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면 결핍으로 남게 된다.

그 사람은 대상을 에로스의 결핍으로 사랑했지만,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을 되돌려 받지 못하면 그 대상은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다.

에로스의 결핍을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채우지 못하면 분노할 뿐 아니라 할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향연]에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에로스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의 일이다.


현실 결혼에서의 아가페와 에로스


2000년 이전의 결혼 풍속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결혼시장에서 모성적인 여자, 현모양처가 주가가 매우 높았다.

소위 맏며느리감의 신부, 교회 사회에서는 사모 감의 여자가 결혼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당시 남자는 엄마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

밖에서 남자가 어떤 형태의 사회적 활동을 해도 모성성이 풍부한 여자가 집안을 지키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현모양처의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모성성을 발휘하고, 자녀들에게도 모성성을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형태가 왜곡이 일어난다.

아무리 모성적인 여자라 할지라도 자신 안에는 여자로서 마땅히 발현되어야 할 에로스가 있다.

남자는 엄마 같은 여자를 아내로 들였기 때문에 아내와 성관계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즉 남편에게 모성성만 발휘하는 아내와 성관계를 하자니 꼭 엄마와 성관계하는 느낌이 들어 근친상간적 정서가 중간에 개입된다.

남편은 현모양처형의 아내를 그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평화유지군으로 활용하고 싶을 뿐이다.

2000년 이전에는 남자 사회에서는 40대가 되면 마땅히 바람을 피우는 시기로 서로서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경향이 많았다.


아내 입장에서는 이런 남편에 대한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달라진다.

아내는 남편과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관계 욕망이 있지만, 그것이 거절당하면 아내는 그러한 관계 욕망, 즉 에로스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붓게 된다.

남편에게 줘야 할 에로스를 아들에게 주게 되면, 무의식적인 근친상간적 관계로 발전한다.

'근친상간적'이라는 말은 꼭 성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고, 아들의 공부 스케줄 잡아주고, 학교에서 학원 이동, 이 학원에서 저 학원 이동시키기 위해 기꺼이 차량 운전 서비스 대기조가 된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가 될 때, 그것은 근친상간적이다.


이렇게 자란 아들은 일평생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해서 엄마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어머니가 원하는 직장에 근무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한다.

심지어 부부간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도 어머니가 되고, 관계가 악화되어 더 이상 수습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이혼도 어머니가 결정한다.

이처럼 되돌려 줄 필요가 없는 아가페와는 달리 에로스는 되돌려 줄 것이 많다.

어머니의 아가페가 아닌 에로스로 양육받은 자녀는 자신의 성공과 성과는 내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욕망을 아들이 대리적으로 실현시켜 드린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에로스로 키워진 아들은 어머니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 바쁘다.

이런 아들과 결혼한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힘들다.

남편의 마음 안에는 자신의 어머니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늬만 부부로 살게 된다.

이처럼 가족 내의 불행은 아가페와 에로스가 구별되지 못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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