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
탐구자 : '존재'라는 개념이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려워요.
분석가 : 한자가 개념을 어렵게 만든 겁니다. '존재'란 영어로 보면, 쉽습니다. 존재는 곧 '있음'(being)입니다.
신학자 : 신학에서 '존재'는 곧 신입니다. 'I am who I am.'(나는 있는 자이다.) 동어반복은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신은 진리일 수밖에 없죠. 하나님의 이름은 이렇게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의 이름이 동어반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가장 완벽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동어반복은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동어반복을 분해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신 것은 히브리 백성들과 관계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동어반복을 해체합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분석가: 유아에게도 I am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1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로부터 '존재'를 획득하는 것이거든요. 그 존재가 바로 'I am.'이죠. 위니캇은 이것을 '여성적 요소'라고 부릅니다. 강아지가 개로서의 원형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미와 12주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유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아가 한 인간으로서 원형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첫 1년간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향후 자신의 삶을 전개해 가는 데 있어 존재 중심이 될 뿐 아니라, 이후 일생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관계의 원형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탐구자 : 위니캇이 말하는 첫 1년 동안의 여성적 요소라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아 성욕'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요?
분석가 : 프로이트는 유아기부터 아기는 성욕이라는 리비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리비도가 처음에는 구강에 집중되어 있어 엄마의 젖을 빠는 동안 성적 리비도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강 다음에는 리비도가 항문에 집중되죠. 그다음에는 남근으로 리비도 집중이 이루어지고요.
하지만 위니캇은 여성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성적 요소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선을 긋습니다. 첫 1년 동안은 본능적 요소가 배제되고, 철저하게 '있음'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바로 그것을 위해 아기를 돌보는 것입니다.
탐구자 : 어머니의 ‘안아주기’를 통해 아기는 좋은 감각과 좋은 감정을 체득해 가는 것이겠죠? 아기는 어머니와의 배타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어머니와의 관계 경험은 향후 맺게 되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원형이 되는 것이라 여겨져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위니캇은 초기 정서발달과정에서 어머니와 관계에서 체득하는 것은 환경으로서의 어머니와 관련된 관계, 즉 안전함, 따뜻함, 자유 등과 같은, 정서적 신체 돌봄을 제공해 주는 사람과의 관계 유형임을 강조합니다.([아동, 가족, 그리고 외부 세계], 64)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융이 유아가 초기발달에서 획득해야 하는 두 가지를 말할 때, 본능과 원형이라 말한 적이 있죠. 위니캇은 크게 다를 바 없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위니캇은 본능에 눈을 뜨는 관계 유형은 절대적 의존기가 끝날 때(생후 1년)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 있어요. 나중에 또 언급하게 되겠지만, 위니캇은 유아는 초기에 어머니의 따뜻하고 안전한 품 안에서 ‘여성적 요소’를 많이 받아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초기 1년 동안은 남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 유보되어야 하는데, 여성적 요소를 충분히 받을 만큼 어머니의 품이 안전하면 본능적 요소가 너무 일찍 들어오는 것(생후 1년 이내)을 막아줘요. 이런 점에서 위니캇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완전히 다른 입장에 있어요.
탐구자 : 여성적 요소가 들어온다는 것은 유아의 존재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분석가 : 프로이트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사고와 감정의 차이로 보지만, 위니캇은 여성적 요소를 ‘있음’(being)으로 남성적 요소를 ‘행함’(doing)으로 구별해요. 그래서 위니캇의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확대된 존재론’이에요.
철학자 : 서양철학의 최초의 고민이 바로 ‘있음(존재)’에 있어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파르메니데스의 명제('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가 바로 존재론이죠. 분석가의 말씀을 들어보니, 위니캇 역시 인간으로서 최초의 고민 역시 ‘존재론’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리쾨르가 말하는, 동일성(나는 있다, I am)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는 것이라 보면 되겠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위니캇은 여성적 요소를 동일성의 불변적 요소로 정착시킨 후 그다음에 남성적 요소인 본능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탐구자 : 어머니의 품이 안전하지 못할 경우에는 본능적 요소가 일찍 들어오게 되겠네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이는 조숙해지는 겁니다. 그때는 철학자 선생의 견해대로 불변적 요소, 또는 ‘있음’의 존재가 크게 흔들려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성적 요소가 존재론적으로 정착된 후에 남성적 요소가 들어가면서 본능적 요소가 들어가면 본능적 요소는 몸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여성적 요소가 ‘있음’의 존재를 형성하면서 불변적 요소로 자리를 잡고 있으면 본능적 요소가 그 존재를 바탕으로 몸에 딱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성적 요소의 활동을 돕게 되죠. 그때 본능적 요소는 남성적 요소를 타자 지향적으로 활성화시키게 됩니다.
철학자 : 방금 분석가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자크 라캉의 개념을 좀 도입해서 설명하자면, 상대적 의존기(생후 1년 이후)에 들어와야 할 본능적 요소가 ‘있음’의 존재를 형성하는 단계(절대적 의존기)에 들어와 버리면 ‘있음’은 결핍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결핍은 욕망의 결핍으로 남게 되죠. 그 욕망의 결핍은 충동의 형태로 정착되면서 충동은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이 충동은 불변적 요소, ‘있음’(존재)을 흔들어 버리니까 동일성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있음’이 잘 형성되어 동일성이 견고해지고, 불변적 요소를 확보한 후, 상대적 의존기에 본능적 요소가 남성적 요소와 함께 들어오게 되면, 타자를 정상적으로 ‘욕망’하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아이가 I am(나는 있다)을 확보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는 불변적 존재가 되고, 그 존재(I am)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불변하는 존재로서 ‘나’로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바로 그 ‘나’가 천국을 가는 것이고,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질 때 부활을 할 때에도 바로 그 ‘나’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세 분(분석가, 철학자, 신학자)의 말씀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전공분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 같군요. 조금 전에 철학자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들어보니까, ‘욕구’와 ‘욕망’의 차이가 분명해지네요. 정신분석에서 ‘욕망’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속적인 욕망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욕망’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보니까, 그분들은 욕망을 ‘탐욕’과 동일시해서 그런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더라고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욕망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이가 어머니를 욕망하다가 어느 순간 장난감을 욕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장난감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그다음 단계의 장난감을 욕망하게 되고, 그 결과 놀이터로 나가게 되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이하기를 욕망하게 되고, 그 욕망은 다시 유치원, 학교 등을 욕망하게 됩니다.
주체는 욕망을 가지면서 그 욕망에 맞는 대상을 추구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라는 TV프로에서 고민을 가지고 나오는 여자들 중에는 결혼 전에는 잘 대해주던 남편이 결혼 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는 경우, 또는 남편이 낚시하러 다니느라 일주일 내내 집을 비우는 경우 등을 보면, 그 남편들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욕망의 대상을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욕망은 왜곡된 욕망입니다.
욕망은 대상이 적절해야 하고, 욕망은 어느 정도 발달적이어야 합니다. 욕망이 미발달 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집착이나 강박이 되고, 밑으로 내려가면 더 이상 욕망이 아니라 퇴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