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환상
탐구자 : 아동기가 되어서 자주 설사하고, 복통을 일으키고, 구토하고 변비 때문에 관장을 해야 하는 등의 문제도 수유장애와 관련이 있나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은 이미지로 자기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아이가 복통이 나서 소아과에 가면 아이들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의사들이 없거든요. 그래서 혼자 끙끙 앓게 된다는 겁니다. 위니캇이 예로 드는 한 아이는 뱃속의 불편함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 뱃속에서 스페인 사람과 영국 사람이 서로 칼싸움을 하고 있어요"라고요.
네 살 된 어린 소년은 음식을 다 먹고 났을 때, "뱃속에 작은 사람이 접시를 두드리고 있다"라고 말하죠. 이런 이미지들이 위니캇이 말하는 ‘구강기 환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아이의 유아기 때 수유상황에서 장애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상(像)들이죠. 아동기뿐 아니라, 청소년기 청년기에도 이런 상들이 자주 나타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몸이 힘들어 과로하게 될 때, 어떤 아이가 나타나서 높은 산을 오르다가 갑자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끔찍한 상을 그려 내기도 해요. 이 사람은 밤에 잘 때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훤한 대낮에 맨 정신에 그런 상을 떠올려요. 그 상들은 모두 내장이 만들어 내는 환상입니다. 이 환상을 매우 리얼하게 경험하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몸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환상이 나타나서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어필하기도 한다고 그래요. 그게 다 내장이 보내는 환상이에요.
탐구자 : 왜 내장이 그런 환상을 만들어 내는 건가요?
분석가 : 위니캇의 이론을 적용해 보면, 내장환상은 유아기에 수유장애로 인한 것이죠.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모든 리비도가 내장에 몰려 있다가 수유과정에서, 그리고 통합되지 않은 상태를 충분히 누리면서 리비도를 서서히 내장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궁극적으로 피부까지 퍼져 나가게 됩니다. 이때 유아는 수유를 만족스럽게 경험하면서 리비도를 온몸으로 분산시켜야 하는데, 만일 수유에 장애가 발생하게 되면, 리비도가 내장에서 피부로 확산되어 나오지 못하고 내장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 피부의 감각의 민감성이 떨어지고 아울러 개인의 인격적 경계를 세우는 데에도 문제가 됩니다. 그런 아이가 학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아이들로부터 여러 모로 침범을 잘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죠.
탐구자 : 소위 <왕따>당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피부 경계가 약하거든요. 리비도가 피부까지 나와야 피부를 경계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게 되면서 자아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리비도가 내장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이 현실적응을 못하게 되고, 어디를 가나 상황에 맞는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자주 찾는 곳은 바로 양호실이죠.
탐구자 : 아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모나 의사나 학교 교사나 무의식적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되겠군요.
분석가 : 무의식에 대한 관심은 아이를 이해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삶의 모든 일상과 직업과 문화와 예술 그리고 신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무의식적 언어를 이해하고 무의식적 의사소통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을 건강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거죠.
탐구자 : 모유 수유와 젖병 수유의 차이에 대해서는 위니캇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젖병 수유를 하면서 모유 수유하는 것처럼 같은 자세로 임한다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요?
분석가 : 좋은 질문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에 아기는 대단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아기는 몸 안에 있는 모든 리비도를 입술에 집중시켜서 젖을 빠는 데에 ‘몰두’를 하기 때문이죠. 위니캇은 바로 이 상태, 즉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흥분 상태에 있는 아기와 어머니의 유대가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더 강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아이, 가족, 그리고 외부세계], 도널드 위니캇, 63) 이에 비해 젖병 수유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모방한 가짜에 불과한 것이죠.
철학자 : 앞에서 말씀드린 플라톤의 이데아 삼중구조로 말하자면, 어머니의 젖가슴은 모성애라는 이데아를 완벽하게 분여 받아 실재(the real)를 보유하고 있지만, 젖병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모방한, 일종의 시뮬라크르(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나마 어머니의 품을 제공받는 가운데 젖병 수유를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젖병 수유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분석가 : 모유수유가 두 사람 사이에 매우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젖병은 어머니를 사물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인 것은 맞지만, 그나마 모성애라는 이데아를 어느 정도 분여 받아서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the real)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겠죠. 그러나 그것이 시뮬라크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아가 느껴야 하는 만족을 충분히 느낄 때, 유아는 <본능적 긴장>의 해소와 함께 만족감, 예상되는 흥분, 그리고 수유 중의 활동경험 등을 체득하게 되는 거죠.
탐구자 : 아까는 분석가께서 아기는 이 시기에 ‘본능’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위니캇은 왜 여기서는 <본능적 긴장>을 언급하는 건가요?
분석가 : 예리하게 보셨어요. 여기서 ‘본능적’이라는 말은 욕구와 관련된 본능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젖이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을 경우, 몸이 자동적으로 긴장을 동반하면서 반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머니가 적절하게 수유를 해 주지 못하면, 본능에 결핍을 가져와서 충동을 낳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구강기적 환상 내지는 내장환상을 가져오게 되고요. 이해가 되나요?
탐구자 : 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 외 다른 양육자가 아기를 잘 키운다고 해도 어머니만이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남아 있게 되겠죠?
분석가 : 물론입니다. 위니캇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수유를 경험한 유아는 동일한 횟수만큼의 젖병 수유를 경험한 유아와는 정서적 상황은 명백히 다르다고 단정합니다.
탐구자 : 모유수유와 젖병수유 사이에 피부 접촉의 한계 외에 차이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일까요?
분석가 : 첫 번째는 공격성의 한계요, 두 번째는 환상의 한계입니다. 첫 번째인 공격성의 한계라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물 때 아기는 어머니의 품과 젖가슴의 접촉으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면서 흥분과 함께 깨물고 싶고 마구 빨아대고 싶은 공격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젖병은 아이로 하여금 흥분과 공격성을 드러나게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마구 공격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아기의 충동과 어머니는 그런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게임이 둘 사이에서 치열하게 일어나야 하는데, 젖병은 그런 여건을 조성하는데 실패조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상호 투사하고 전이를 일으키는 인격적 교류가 두 상황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죠. 두 번째로 언급한 ‘환상의 한계'라는 것은, 어머니의 젖가슴이 제공하는 환상과 젖병이 아기에게 제공하는 환상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어머니가 제공하는 것은 젖가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아기에게 주는 것이거든요. 그때 아기는 어머니에게서 1차적 대상으로서 전(全)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니캇은 아기가 어머니를 전인격적인 사람으로 만나게 됨으로써, 유아 자신도 작으나마 전인격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존재로서 인생을 출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