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접촉 결핍증
탐구자 : 모유 수유가 황홀한 상태를 동반하게 된다고 할 때, ‘빤다’는 행위가 가진 의미 중 나중에 사춘기나 성인기의 성적 취향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나요?
분석가 : 네,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위니캇은 “성적인 종류의 느낌들이 유아기의 모유 수유와 관련된 느낌들과 경쟁”([아동, 가족, 그리고 외부 세계], 64)한다고 표현합니다. 위니캇의 이런 언급은 유아기의 모유수유 방식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이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유사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모-아 두 사람 사이에서 피부 접촉이 얼마나 공감적으로, 그리고 밀접하게 이루어지느냐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 성적 성향을 좌우하게 되고, 이성 교제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느냐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육을 받는 동안 피부접촉에 결핍이 있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피부 접촉을 시도해 오면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건전한 이성 교제를 위해 경계를 세워 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마음은 경계를 세우고 싶지만 몸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성을 매개로 하여 관계 중독에 쉽게 빠져들게 됩니다.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임상의사인 빌 존스(Bill Jones) 박사에 의하면 ‘가출 소녀의 90%가 접촉 결핍증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탐구자 : 젖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모유수유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때, 양육자가 정성껏 피부접촉을 충분히 하면서 젖병 수유를 하면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분석가 : 어머니가 항생제를 많이 맞아서 젖을 줄 수 없을 때, 젖병 수유를 마치 모유 수유하듯이 할 수 있다면 그런 상황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될 수 있어요. 이 경우도 일단 안아주기를 잘해 주고, 피부 접촉을 많이 해 줘야 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닌 사람이 젖병 수유를 하는 경우, 어머니만큼 모성애를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게 되면서 한계상황이 빨리 발생하게 될 겁니다. 반드시 어머니가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기를 진정한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양육자가 필요합니다.
탐구자 : 이런 견해도 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에게 사회적 스펙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과연 사회적 스펙을 포기하면서까지 꼭 모유수유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견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여성은 이 시대에 위니캇처럼 ‘모유수유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분석가 :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여성은 자기 몸매 관리를 위해 모유수유를 포기하는 여성보다 더 이기적입니다. 먼저 그 견해 속에는 어머니로서 아기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라면, 모유수유가 옳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이 따라 주지 못해 현실을 좇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만일 여성이, 나의 사회적 스펙을 쌓아가기 위해 모유수유를 배제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폭력입니다. 현실을 논하기 이전에, 부모는 아기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기준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20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앞으로 100년 후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아기가 엄마의 스펙 쌓기를 이해해 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사회적 스펙을 위해 직접 양육하는 것을 포기하는 엄마는 그렇게 양육했을 때 아기에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모성 결핍, 마땅히 제공받아야 할 엄마의 따뜻한 품의 부재, 엄마의 공감적 양육의 부재, 정신적 트라우마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지, 그 결과 앞으로 어떤 부작용과 증상으로 고통받게 될지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못하였다면, 그 자녀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반드시 놀이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엄마들 중 대부분은 '내 아이는 아무 일이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그 엄마 자신만의 '정신승리'에 불과합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육아휴직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분석가 : 위니캇은 첫 3년 동안 어머니가 아기를 잘 품어 주면, 그다음에는 아이로부터 되돌려 받을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영국에서는 멜라니 클라인이나 위니캇의 정신분석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 사회 자체가 이런 육아를 위한 휴직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이 그 사회에 미친 영향이라고 봐야겠죠. 그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가 그렇습니다. 신문을 보니, 스웨덴에서 3년간 육아휴직은 산모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3년의 육아휴직이 자유롭지 못한 것 자체가 바로 ‘사회적 폭력’입니다. 여성들이나 남성들은 건강한 자녀양육을 위해 바로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런 폭력에 저항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탐구자 : 고아원에서 양육되는 아이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요즘 고아원에서도 영양을 잘 공급해 주고 있다는데 그것만으로 부족한가요?
분석가 : 물리적으로 잘 안아 주고 잘 먹이고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안아줌’입니다. 헝가리 출신의 대상관계 정신분석학자인 르네 스피츠(Rene Spitz,1887-1974)는 1940년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국립병원 의사였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아기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 병 이름을 마라스므스(Marasmus)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멕시코에서 겨울 휴양을 보내고 있던 스피츠 박사가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게 되는데, 휴양지 근교의 한 고아원은 미국의 병원에 비해 위생적이지도 않았고 영양공급 상태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혈색도 좋고 건강미가 넘쳤으며, 우는 아이가 별로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 고아원에 몇 달간 머물면서 아이들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관찰 결과, 스피츠 박사는 아이들이 건강한 것은 이웃마을에 사는 여인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마을의 아낙네들은 매일 고아원을 찾아와 아이들을 안아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이 연구 결과를 The First Year of Life라는 책에 싣게 되었고, 미국정부는 스피츠 박사의 연구를 보고 고아원을 없애고 입양제도로 바꾸게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탐구자 : 젖을 잘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품을 제공하면서 피부접촉이 많아야 한다는 말도 되겠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유아기에는 엄마가 아기와 피부접촉을 많이 해 줘야 합니다.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목욕시켜 주면서 직접 피부를 공감적으로 접촉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그런 연구도 있습니다. 유아기에 피부접촉이 부족하면,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사춘기가 되면 이성과 피부를 맞닿는 일을 서슴지 않아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도 키스하고 껴안고 하는 것은, 피부접촉을 통해서라도 친밀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유아기 피부접촉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말초적인 친밀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면서 쉽게 성관계를 가지게 되기도 하는데, 이런 관계는 서로가 친밀함을 가장한 침범이기 때문에 쉽게 헤어지게 됩니다. 조금만 마음이 상해도 쉽게 헤어지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친밀함을 느끼지 못하고 피부로 친밀함을 가졌기 때문에, 조그마한 갈등이 생겨도 그동안 침범하고 침범당했던 관계들이 너무 빨리 표출되고, 그 갈등은 걸러줄 수 있고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기 때문에 쉽게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 성경에도 어머니 품의 부재로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는 어머니의 부재가 부재함으로 가려져 있어 부재함에 대한 인식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인물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서 상황이 전개되어 갑니다. 그 인물의 문제 상황은 바로 어머니의 부재와 연결된 결격사유를 고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다윗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초기의 피부접촉 결핍증은 異性의 피부를 접촉함으로써 결핍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많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많은 아내와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그나마 합법적인 방법이지만, 밧세바 사건은 일종의 억압된 유아성욕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중년기에 접어들 때, 이상적인 여자, 또는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천박한 여자를 만날 때, 억압된 유아성욕이 발동되면서, 그동안 노련하게 자기 관리해 왔던 자신의 경력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 억압된 욕망을 채우게 되죠. 다윗에게 밧세바는 바로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사진출처: pexel)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만 애타게 아들을 기다릴 뿐, 어머니가 부재합니다. 어머니의 부재가 의미를 던져줍니다. 이 부분은 어떤 설교자도 보지 못하는 대목입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겠다는 둘째 아들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고, 떠나감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부재하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무의식적 여정임에 틀림없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15:13) 어머니의 부재로 인하여 생긴 여성에 대한 이미지의 결핍으로 하나의 여자의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고, 수많은 여자를 접해야만 겨우 하나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