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의 질문, 나는 누구인가?

지식과 지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탄생


오이디푸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라이오스 왕은 불쾌한 신탁을 받았다.


"이 아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는 신탁이었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 숲으로 아기를 데려가서 죽일 것을 명하였다.

신하는 숲으로 아기를 데리고 갔으나 차마 죽이지 못해 이웃 나라에 버리게 되었다.

이웃나라 목동이 아기를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 아이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얻고 왕의 아들로 자랐다.


오이디푸스가 성인이 되자 우연히 자신과 관련된 신탁을 듣게 된다.

자기는 아버지를 죽일 의사도, 어머니와 결혼할 의사도 없으니, 이 나라를 떠나야 되겠다 싶어 이웃나라 테베를 향한다.

길을 가는 도중에 마차를 거칠게 몰고 가는 어떤 늙은이와 시비가 붙어 결투 끝에 오이디푸스는 늙은이를 죽이게 된다.

테베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만난다.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잡아먹어 테베의 큰 우환이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와 마주하게 된 계기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 때문이다. 라이오스 왕은 과거의 잘못으로 헤라에게 제대로 찍혔다. 헤라는 라이오스 왕을 벌하기 위해 스핑크스를 보내고, 스핑크스는 그 길로 테베 주변에 눌러앉아 사람들을 상대로 수수께끼 내기를 시작하며, 이를 맞추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을 잡아먹었다.(나무위키)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기 위해서는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는 길목을 지나쳐야만 했다.

스핑크스가 수수께끼를 내어 맞히지 못하면 잡아먹는 일이 계속 발생하자, 여왕인 이오카스테는 이 괴물을 죽이는 자는 왕위는 물론 자신과 결혼할 수 있다고 공표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을 가진 것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고민 끝에 "인간"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은 아이로 태어나서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어른이 되면 두 발로 걷고, 나이를 먹으면서 지팡이를 받쳐 세 발로 걷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자기 약속대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그러자 여왕의 약속대로 오이디푸스는 테베 왕이 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불행히도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 자신을 낳은 어머니였다.


테베의 저주


오이디푸스는 탁월한 지식으로 테베를 잘 다스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재앙들이 닥치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왕은 신탁을 받으니,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일'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은 ‘이런 패역한 자를 찾아 두 눈을 파내어 사막으로 추방’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자 예언자 테아이테토스가


"그 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오이디푸스가 듣는다.

그는 스스로 두 눈을 파고 딸 안티고네의 인도를 받아 사막으로 추방당한다.


오이디푸스의 지식의 한계


오이디푸스는 너무 지나치게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지혜가 너무 지나쳐서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날 과학이 그러하다 과학적 지식은 보편을 추구한 결과, 신의 영역을 넘어서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지식의 속성, 의식의 속성이 그러하다.

일찌기 최초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는 확실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을 개입시켰다.

데카르트는 나중에는 신의 자리에 과학은 살짝 앉혔다.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명석판명한 지식이 판을 치게 되었다.

지식이 신을 역할을 하게 되면서 세계가 돌아가는 형태가 더욱 분명해졌다.

현대인은 지식의 전능함에 빠져 자기 존재를 잃어 버렸다.


오이디푸스가 유능했던 지식은 세상을 아는 전능함과 관련된 지식이었다.

그의 지식은 개념을 잡는 데에 능한 것이다.

세상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식, concept은 모두를 한꺼번에 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지식이다.


오이디푸스가 정작 몰랐던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객관적 세계로 자신의 영역을 한 없이 넓혀 나갈 때, 어느 순간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내린다.

과학이 모르는 것은 과학 자체 안에 있는 ‘자기(self)’를 모르고,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 안에 있는 ’자기‘를 모르는 것이다.


지식이나 의식은 학문의 모양으로 발전하여 보편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개별성을 추구한다.

지식의 세계나 오이디푸스는 동일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나, 예술의 세계는 차이의 세계로서 여기서는 무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일성의 세계에서는 지식의 과다를 따지고, 지식에 대한 시험을 쳐서 석차를 낸다.


지식은 보편을 추구하나, 예술은 개별성을 추구한다.

현실에서는 현대인들은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혀 있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는 몸이 묶여 있다.

사이렌의 소리를 듣는 오디세우스처럼.



Who am I?


오이디푸스는 보편적 지식에는 능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아동기,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내면서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 즉 보편적 지식이다.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 경제적 기반 등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다가, 중년기가 넘어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모은다.

이때 유효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오이디푸스는 세상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믿었던 뛰어난 지성과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가장 심오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런 질문을 위해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다.

결혼,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의미있는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사회적 페르소나을 뒤집어 쓴 '나'와 배우자 앞에서의 '나'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객관적 지식이나 지성 앞에서의 '나'와 가족과 감성적으로 대화하는 '나'는 분명한 격차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배우자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또 이 사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저 사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질문이 내게 던지는 질문인지 알지 못 한 채 자기 만족, 즉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아간다.


오이디푸스도 그랬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자기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갔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과도한 지식 추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한다.

그의 이야기는 지식 추구 자체가 끝이 아니며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삶의 더 깊은 신비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세상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해서 찾으면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를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이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면, 제 아무리 돈많고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탁월한 명예를 가졌다 해도 그는 <헛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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