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지옥(7): 나의 원수는 누구인가?

원수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는 누구인가


나의 원수는 누구인가?

극도로 미워하는 대상일 것이다.

그래서 원수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라 하면,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어쩌면 가장 용서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내어 원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며, 남을 속이는 사기이며, 모두를 속이고 하나님마저 속이고자 하는 <자기 의>이다.


먼저 목회자들이 강단 위에서 원수사랑을 너무 가볍게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너무 수월하게 원수 사랑을 실천해 버린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자기 의>이다.


원수 사랑은 그렇게 쉽게, 마음먹는 대로, 믿음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원수 사랑은 그 원수를 놓고 일평생 동안 수행해야 할 가장 큰 과제다.


진정으로 원수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를 깊이 숙고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원수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리 쉽게 '원수 사랑'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원수는 누구인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36)


이는 예수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미 7:5-6)


라는 구약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일 것이다.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단번에 거두고, 단번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정서를 가졌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원수 사랑하기의 어려움


원수는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철저히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나와 원수 관계가 성립된다.

나와 정서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제 원수에 대한 미움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방법은 단번에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미움의 자리까지 밀어내는 데에는 지속적인 갈등의 관계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서로 싸울 것을 다 싸우고 나면 그다음부터 그 싸움을 거둬들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

원수로 미워하는 일이나 원수를 다시 사랑하는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상호 간에 갈등을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이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하는 메커니즘이 되고, 그런 긴 갈등 과정을 겪어내면서 미움은 사랑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다.


가족 간 관계가 원수로 남아 있으면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족 밖의 관계에서 늘 갈등에 빠져 들게 되고, 분노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원수들로 에워쌈을 당하게 된다.


눈앞의 원수는 내 안에 있는 그림자


원수를 사랑하려니까 그 원수는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짓을 실제로 한다.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느냐 하면, 내 눈앞에 보이는 원수는 곧 내 안에 있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 원수가 나의 그림자라는 말을 잘 이해하자.

내 안에 있는 그림자를 직접 본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마치 내 뒷머리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의 무의식은 그림자를 다른 사람의 모습에 투사함으로써 나의 내면의 모습을 보게 한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미운 짓이나 미운 말을 통해 보이는 것을 내 모습이라고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상대방이 왜 미운가를 생각해 보면 이를 이해하기 쉽다.

상대방이 아무리 엉뚱한 짓을 해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절대 미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그냥 엉뚱한 짓을 하나보다 생각하며 그냥 넘어간다.


그가 하는 행동마다 밉고, 하는 짓마다 예술이고 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바로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원수 사랑은 매우 쉬워진다.

결국, 원수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그 원수라는 존재가 가족 밖에 있을 때는 이런 그림자 인식과정에서 갈수록 원수 사랑이 수월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원수가 가족일 때는 원수 사랑이 녹녹지 않다.



꿈으로 나타나는 나의 원수

그림자는 나 스스로의 의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꿈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해 준다.

꿈에서 주로 나와 같은 동성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바로 내 원수요 내 그림자이다.


[꿈-잊혀진 하나님의 언어]라는 책(저자:샌포드)에서 인용한 예화를 보면, 어떤 목사가 꿈에는 한가하게 낚시질 하는 청바지 입은 비트족이 나타났다.

목사는 평소에 예의 바르고 격식을 갖추고 페르소나를 갖춘 사람이고, 항상 시간이 없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끌어내리는 모습이 한가하게 낚시질이나 하는 청바지 입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 대는 비트족이 나타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강한 권력욕을 가진 남자는 꿈에서 너무나 쇠약한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원수의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그 원수가 우리 내부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우리 자신의 마음에 지니고 산다.

원수가 나 자신과 모순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수를 미워한다.

만일 원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전복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것은 나의 정신세계에서 체제 전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내면에서 어떤 반역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반대로 아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는 일


우리 안에 있는 원수를 인식하는 것, 내 안의 그림자를 밝혀 내 인격 안으로 들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황금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동화 속에 개구리가 어느 순간에 잘 생긴 왕자로 변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원수들을 친구로 받아들였을 때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성의 회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내면에 있는 원수는 우리가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한은 우리를 왜곡시키지만, 일단 깨닫고 수용하기만 하면 우리를 왜곡하기보다 우리를 완성시켜 준다.

이전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이던 특성들이 이제는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게 된다.

원수사랑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결국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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