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치 VS 존재의미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 한다.
가치와 의미는 함께 놓고 보면 서로 하나의 쌍으로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가치는 외부를 향하고 있는 반면, 의미는 내면적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의 방향성은 남성과 여성이 추구하는 것의 차이와 일치한다.
남성은 가치를 추구하고 여성은 의미를 추구한다.
대부분의 남성이 추구하는 ‘외형적 가치’는 남성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여성들이 추구하는 ‘존재의 의미’는 심리 내면에서 발견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타고난 본성뿐 아니라, 양육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본성과 양육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양자 간 본성의 차이가 양육의 차이를 만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권력을 얻는 것이며 아들 출산으로 인해 그 어머니는 가정 내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다.
그래서 아들 돌 사진은 아랫도리가 다 드러나도록 바지를 벗겨놓고 찍는 것이 당연한 풍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걸어 다닐 나이가 되면 엄마는 아들에게 절대 바지를 입히지 않는다.
어머니의 권력의 상징이 되는 아들은 어머니는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 주며, 아들 역시 엄마의 강력한 시선을 받으면서 나르시시즘을 채운다.
그런 면에서 딸은 아들과 다르다.
대개 엄마는 딸에게 나르시시즘 대신에 자신의 존재론적 부끄러움을 투사한다.
딸은 엄마로부터 자기애적 시선을 받지 못하게 되고 동시에 딸 자신도 나르시시즘을 채우지 못하고 만다.
엄마가 보여주는 방향대로만 보며 사는 아들과는 달리 딸은 자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으로 살피면서 살아간다.
딸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지?’
이렇게 시작된 딸의 삶은 이미 거세되어 버린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불안을 극복해 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자녀가 세 살이 되면, 아버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로 다가온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이놈! 사내자식이 울지만 말고 말로 해! 내 말 안 들으면 네 고추 잘라 버릴 거야"라는 위협적인 메시지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아들은 소위 ‘거세 불안’을 시달린다.
거세 불안은 아들로서는 너무나도 끔찍한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들은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아버지를 내면화하여 '초자아'라는 정신적 기구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를 감시한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방과 후 문방구 앞을 지나가는 중에 멋진 장난감이 눈에 띄어 손으로 집으려고 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이놈!’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까지 아들은 외부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이놈!’을 직접 들어왔는데, 어느새 아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놈!’하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초자아의 형태로 내면화되었고, 아들은 이를 자신의 인격을 구성하는 새로운 기구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초자아가 형성되자마자 아들은 내면세계를 초자아에게 맡기고 자아로 하여금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게 만든다.
이때부터 아들은 외부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가 주는 나르시시즘을 채워가는 형태로 자라왔기 때문에 엄마가 보여주는 방향만 보면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 있다.
그리하여 아들은 엄마가 정해주는 분야에서는 유능한 경쟁력을 갖춰가지만 시야가 협소해져서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부분적 대상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반면 처음부터 엄마의 자기애적 시선을 받지 못한 딸의 경우는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하는 억울함을 기본 감정으로 삼아 자신의 주변을 두루 살핀다,
딸은 존재론적으로 처음부터 전체적 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 전체 대상관계를 가지게 된다.
남녀 간에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는 성장과정에서도 나타나지만 무엇보다 부부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부부는 중년기를 지내는 동안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부부갈등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남편의 기억과 아내의 기억이 다르다는 데에서 발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외양적 가치를 중시하는 남편은 ‘내가 이 가정을 위해 얼마나 잘해 왔는가’ 하는, 가정을 위해 자신이 기여한 ‘공로’를 중심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반면에 아내는 결혼생활 하면서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외면당하게 된 사건들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중심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남성은 자신의 ‘공로’에 대해 ‘사고’를 활용하면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사건들을 기억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상처’로 기억하는 모든 사건 안에는 emotion으로서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의 본래적 감정은 feeling이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 의미를 외면당한 결과 feeling 대신 emotion으로 가득 차 있다.
feeling과 emotion은 엄연히 다르다.
여성성을 내용에 해당하는 feeling은 꽃을 보며 ‘아름답다’, 또는 일상에서 ‘행복하다’고 느낌, 좋은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잔잔한 감동’ 등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feeling은 몸의 움직임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emotion은 feeling을 그때그때 느끼지 못하고 억압해야 했던 억울함의 형태로 몸에 기록되면서 ‘감정적(emotional)’이 된다.
이때 emotion은 몸을 동반하게 된다.
눈물을 흘린다거나 울컥한다거나 몸을 떨며 분노하는 등 몸의 격정을 끌어올리는 형태의 감정이 바로 emotion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방식의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동안 왜 서로 합이 맞지 않는 싸움을 싸워야 했는가가 이해될 것이다.
남성은 ‘사고’로 기억하지만, 여성은 ‘감정’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부부간에 보다 생산적인 갈등, 성숙을 위한 갈등을 감당해 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부부간에 이런 차이를 모른 채 갈등을 겪는다면 서로 합이 맞지 않는, 허공을 찌르는 무의미한 싸움이 된다.
결혼한다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다른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통해 성숙한 삶과 관계를 살아내라는 과제를 부여받는 것이며, 부부에게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만들라는 사명을 부여하는 제도라는 것을 기억하자.
남성과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은 성마다 각기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로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삶만을 고집하며 살라고 성이 갈라져 있는 것은 아니다.
분리되어 너무나 다른 두 성이 통합을 위해 누구나 각자 다른 성을 이면적 인격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혼은 두 성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안에 있는 다른 성을 통합함으로 인격의 성숙을 이룩해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이해가 깊어지는 계기를 맞으면서 부부관계를 승화, 지고(至高)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중년기는 바로 이를 위해 주어진 선물이다. 이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하여 받지 못하고 그냥 놓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오직 극소수만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글은 읽는 사람은 이를 놓치지 말 것과 이미 놓친 사람은 다시 시작할 것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