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여성성으로 만나다
건강한 사람은 적절한 페르소나를 유지하며 잘 살아간다.
적어도 학교를 다니는 시절이나 청년기, 또는 성인기에 자신의 원하는 사회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페르소나를 옷 입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앞의 글에서 페르소나에 매몰되었을 때가 문제임을 지적했다.
페르소나에 매몰되었을 때 자아를 상실할 수 있음에 대해 앞의 글에서 강조되었다.
페르소나에 매몰되었을 때 상실할 수 있는 또 하나는 바로 심혼의 상실이다.
심혼이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칭하는 말이다.
아니마란 남자 안에 있는 여성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자 안에 있는 남성성을 말한다.
앞의 글에서 페르소나가 입는 여러 가지 옷에 대해 언급하였다.
페르소나는 2~4세경에 떳떳하게 거짓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청소년기에 성욕을 감추기 위해 제1자아와 제2자아로 분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인으로서 페르소나를 덧입으며 살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페르소나에 매몰되어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상실할 위험이 있음을 경고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심혼의 상실은 부부관계를 악화시키고, 삶의 질을 붕괴하는 등 매우 심각한 상황을 일으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주된 주제에 대해 먼저 논해야 한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보여주는 만큼만 보면 되었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 자체가 어머니의 권력을 보장해 준다.
어머니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아들에게 투사하여 아들만 보면 힘이 난다.
그래서 아들은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자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어머니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 된다.
이런 아들도 오이디푸스 단계를 지내면서, 아버지를 권위자로 받아들이면서 아들 자신도 남자다워지기를 소망한다.
그 과정에서 아들은 거세공포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공포 때문에 급속하게 초자아를 만들어내어 더 이상 끔찍한 내면작업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이 두려움은 정서 발달에 방해가 되어 정서적 성장 정체를 유발한다.
그때가 대체로 7세 정도이다.
이 상태에 머물러 '영원한 소년'을 내면에 품고 살아가게 된다.
내면의 자기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아들은 외부로 눈을 돌린다.
아들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이룰 것이 뭔지를 파악하는 데에 주력한다.
자신의 내면을 보지 않기 위해 부모님이 원하는 공부 잘하기로, 명문고, 명문대 들어가는 것으로 초점을 맞춘다.
아들은 사회적으로 잘하면 잘할수록, 또는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자신의 내면 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영원한 소년을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체계 속에 자신을 매몰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곧 자신의 인격이 되는 것으로 지각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그 내면에는 7세 이후 자라지 못한 영원한 소년이 들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 즉 페르소나를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아니마이다.
그동안 남성은 페로소나 일변도로 살아왔기 때문에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이 인격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 페르소나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남자가 이를 거부하고 계속 사회적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은퇴를 하는 순간, 급격하게 어린아이가 된다.
7살에 머물러 있는 영원한 소년이 자신의 인격 안으로 들어와 주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까지 몰아 왔다면, 그는 오랫동안 사회적 페르소나에 갇혀 매우 나르시스틱 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사회적 페르소나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그의 본래적 인격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권위 있게 살아가다가 갑자기 어린아이의 면모를 가지고 아내 앞에서 아들처럼 행동하게 된다.
보통 이때부터 남편에 대한 여자의 보복이 시작된다.
칼융은 중년기가 되면 남자는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여성성을 발달시킬 것을 주문한다.
그동안 페르소나는 현실에서 자아실현의 도구로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중년기가 되면, 인생의 과제는 더 이상 자아실현이 아닌 자기(self) 실현이 된다.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내적 인격인 아니마가 페르소나를 적절한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는 남자의 페르소나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남자 안에 있는 아니마 밖에는 없다.
남성이 한동안 사회적 페르소나를 형성하고 페르소나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를 정하고 안전한 미래를 구축해야 했던 것은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페르소나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종종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만들고 자기실현을 하는 데 있어 자신의 고유한 인격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문제를 남긴다.
남성이 자아실현을 위해 외적 인격으로 사는 데에만 열중하고 내적인격인 아니마(여성성)를 자각하지 못하면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한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이 자아실현에만 집중할 뿐 아니마의 작용이 뭔지 자기실현이 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결과 남성들은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다거나,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거나 그런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연루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미투사건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고통이 메아리칠 때, 가해자는 대부분 중년의 남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중년 남성은 아무런 생각 없이 뱉은 말이 '성희롱'이라는 스캔들로 발전하여 자신의 사회적 직책을 내려놔야 했다.
평생 경건한 페르소나를 가꾸어 온 한 성직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어느 날 길을 걷던 중 그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여성을 훔쳐보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내면의 여성성은 자신의 경건함이 부족하다고 훈계하며 일상적인 페르소나와 진정한 자아 사이의 괴리를 드러냈다.
이는 내면의 여성성이 그의 경건한 페르소나를 향해
"너, 그렇게 경건한 사람 아니거든..."
라고 일상의 페르소나로부터 나오는 자부심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발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이런 일들이 중년 심리 구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런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그동안 외적인격인 페로소나를 갈고 닦는데 사용했던 리비도를 내적 인격인 심혼(여성성, 아니마)가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행히도 아내가 그동안 모성성을 발휘하다가 중년기가 되면서 여성성을 발달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끄집어 내기 시작하는 때이다.
아내의 여성성이 남편의 여성성을 자극해서 외적 인격을 끌어내리는 작업을 하게 된다.
또한 여성성을 포용한다고 해서 남성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두 가지 측면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남성성과 함께 여성성을 발전시킨 남성은 더 깊은 자아실현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는 보다 만족스럽고 조화로운 자기실현의 삶으로 발달해 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성은 중년이 되면 페르소나를 버리고 자신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페르소나에 대한 의존은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아실현을 위해 필요했지만, 중년기의 어느 순간부터는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고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중년은 남성이 자신의 자아를 인식하고 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보다 진정성 있고 자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시기이다.
남성성과 함께 여성성을 통합함으로써 남성은 보다 균형 잡히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남성이 외적 인격인 페로소나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다보면, 자기 안에 있는 영원한 소년과 자아 본성, 그리고 여성성을 상실할 수 있다.
남성 안에 미개발된 이 세 가지를 쓰리큐션 한큐에 해결하려면 아내의 여성성을 외면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데, 중년기가 되면 아내가 예전의 태도와 달라지면서 여성성을 찾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남편의 여성성과 아내의 여성성이 상호 연결되어서 서로의 인격 발달을 꾀할 수 있다.
아내가 오랜 세월 모성성으로만 살다가 중년기 후반이 되면서 모성성을 멈추고 여성성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때 아내는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진다.
아내가 찾고자 하는 감정은 여성성이지만, 그 여성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동안 억울하게 억압해 온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중년 후반이 되면, 남자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이 가정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공로를 많이 쌓았나'이다.
그렇지만, 여자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남편으로부터 얼마나 상처받았는가?' 이다.
이처럼 중년 후반 여성은 억울함과 원한감정이 극대화된다.
아내는 그동안 남편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억울함과 원한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해 내면서 남편에게 호소하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여성성 작업이 시작된다.
아내가 억울한 것은 남편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모성성을 발휘하면서 지나치게 이해하고, 용납해 온 것들이다.
이제 이해와 용납을 멈추고, 그동안의 억울함과 자신의 고유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아내의 여성성 작업이 시작된다.
이 시기는 때마침 남편이 내면의 여성성으로 페르소나를 끌어내리는 시기이다.
남편은 자신의 내면의 여성성만으로 페르소나를 끌어내리기에 역부족인데, 아내가 여성성을 남편에게 투사하니까 어쩔 수 없이 여성성 작업을 하게 된다.
아내의 고통의 하소연은 결국 남편이 투사한 고통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되돌려 받으면서 남편은 반성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철들게 되고, 철들면서 내면의 영원한 소년이 자라게 되며, 자신의 내적인격인 여성성도 발달하게 된다.
결국,-남편과 아내는 중년기에 내면의 여성성을 발달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차원, 관계의 정서적 친밀감 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