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과 원형(5): 무한한 잠재력에서 개별화의 여정

고유한 인격으로 나다운 삶 살기


인공지능과 사람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자기(self) 발견의 과정이다.

자기 발견은 성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일평생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잠재력을 모두 현실화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에 가까운 존재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월등하게 탁월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사람사이의 분명한 차이가 여기서 변별된다.

인공지능의 목표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사람의 목표는 신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인공지능보다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능력 면에서도 인공지능보다 탁월하다.

다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능력을 잠재력의 형태로 가두지 않고, 현실능력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신이 될 수 있다면,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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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감각의 출현


사람은 다행히도 신체적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법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득한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내장 감각에서 피부감각으로 발달시키면서 점차 신체의 한계에 의해 제한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기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신으로 비인격화되는 것보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고유한 인격을 자신의 몸의 한계 안에서 몸체화된 인격이 주는 제한된 쾌락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람의 신체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동안 태초의 별에서 형성된 기본 요소(탄소, 산소, 수소, 질소, 인)를 가지고 와서 자궁 안에 머물다가 그가 세상에 나올 때는 우주적 존재로서 태어난다.(참고,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이론 강의] 이석영, 사이언스북스)

그래서 인간의 신체의 역사는 137억 년에 달하고, 인간의 인식의 범주는 태초에서 현재까지 포괄한다.


이런 우주적 존재로 태어나서 인간이 무한에 가까운 능력의 범주를 사용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지금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품 덕분이다.

어머니는 이 우주적 존재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 아기는 어머니 심장의 주파수 7.83 헤르츠에 자신의 신체 주파수를 맞추어 간다.

어머니와의 신체적 접촉이 너무나도 황홀하기 때문에 아기는 우주의 주파수, 태초 별의 주파수를 어머니 몸의 주파수에 맞춰간다.

어머니의 주파수 7.83 헤르츠가 바로 지구의 주파수(과학에서는 이것을 <슈만공명>이라 부른다)이다.


이러한 주파수 수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젖을 먹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공생단계>(생후 1 ~ 5개월)을 거쳐 <분리-개별화 단계, 5개월~36개월 사이) 중 구별기(생후 5개월~10개월)에 구체화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내장에 모든 에너지를 모은 상태이다.

이 에너지를 온몸을 보내어서 피부까지 확산하는 것이 생후 첫 1년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에 대해 마가렛 말러는 내장감각에서 피부감각으로의 리비도 전환이 일어나는 형태로 언급했다.

내장감각은 피부감각으로 전환이 일어나면서 내장 에너지는 온몸으로 확산된다.

내장 에너지가 그대로 피부/몸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리비도 전환이 일어난다.

리비도 전환이란, 동물적 에너지에서 인간 에너지로의 전환과도 같은 것이다.

아기가 피부감각을 발달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무한대로 전능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범주를 포기하고, 피부를 한계로 하여 독립적이고 개별화된 인격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인간 발달의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가 아닌 유사천재들을 많이 봐 왔다.

알고 보면 그런 유사천재들은 신체적 제약에 대한 피부감각의 부재로 어릴 때부터 전능감을 추구하며 순수한 의지력을 통해 어떤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천재들이 남달리 잘하는 것이 있다면, 남다른 기억력과 계산력 뿐이다.

말하자면 그런 유사 천재는 창의력이 부족하다.

2세에 한글 한자 마스터하고 5세에 미적분을 푼다는 천재들 중 자기 비판력이 들어오는 청소년기에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도 모르게 잘하는 것은 일단 내 것이 아니다.


'나'라는 것은 피부를 한계로 한 제한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사람은 내장감각에서 피부 감각으로 리비도가 전환되면서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인식하면서 무한했던 잠재력은 신체 인식의 크기만큼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잘하는 무한한 능력보다는 한계 안에서의 존재로서 외부환경과의 갈등을 겪어가면서 성장해 가는 개별화의 길을 걷게 된다.


내장 감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능력으로 전능성에 도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반면, 피부감각으로의 리비도 전환이 일어나 신체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아기는 제한된 신체를 가지고 외부 환경에 적응하거나 거스르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개별적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한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한계를 인정함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찾기 위해 독립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제약을 인정함으로써 아이들은 장차 목표를 세우고 한계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고유한 능력과 지식, 그리고 재능을 탐구하게 된다.

이것이 독립의 의미이다.


피부감각과 자기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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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성장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피부 경계 내에서 자아 탐색하는 과정은 자기 성찰을 촉진하여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욕구, 가치, 신념을 인식하도록 돕는다.

인간 경험의 한계는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그리는 캔버스 역할을 하여 개성을 형성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


역설적이게도 한계를 포용하는 것은 자아의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체적 존재의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은 그 안에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마스터하려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회복력, 적응력, 성장 마인드을 배양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계를 성공의 걸림돌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이끄는 디딤돌이 된다.


피부감각의 리비도 전환으로 개별적 존재로서 성장과 성취를 추구하는 대신, 내장감각에 머물러 전능감, 또는 무한성, 신적 존재의 도래를 추구하는 하는 사람은 그만큼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내장감각과 은사추구


이 항목은 기독교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장감각과 피부감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본에서 왔다는 어떤 종교는 멤버들이 함께 모여서 주문을 외운다고 한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문외우기를 통해 더 큰 형태의 종교적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종교적 현상이란, 곧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 종교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도 존재했다.

바로 '피타고라스 학파'이다.


그렇게 황홀경에 빠지는 현상을 오늘의 주제와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집단적으로 주문을 외우면, 잡념이 없어지면서 각자의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내려놓게 되면서 집단 무의식에 진입해 들어간다.

이 말은, 자신의 피부감각적 리비도를 포기하고 내장감각으로 퇴행하는 형태로 리비도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고유한 인격이나 독특한 개성을 포기하는 것은 집단적 사고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피부/몸 감각에서 내장감각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집단화된 종교(이것은 신흥종교가 심하지만, 고등종교도 예외라 할 수 없다)일수록 내장감각으로 잘 내려간다.

이단 종교가 정통종교보다 더 잘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다단계에 쉽게 빨려드는 사람,

보이스 피싱에 쉽게 말려드는 이유 등

모두 리비도 전환(내장감각 에너지에서 피부/몸 감각 에너지로 전환)이 확실하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은사를 행사하는 일에 지나친 방점을 두고 있는 사람이나

성경말씀보다 기적이나 직통계시를 더 사모하는 사람 등이 바로 피부감각을 포기하고 내장감각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내장감각에 기반을 둔 신잉이었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의 신앙은 피부/몸감각에 기반을 둔 신앙이다.


특히 무당처럼 신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내장감각을 가진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집단 무의식을 사용하는 일에 강하다.

그래서 매우 강력한 원형적인 일들을 감당해 낸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고유한 인격이나 독특한 개성이 없으며, 나만의 구별된 삶이 없다.


이처럼 사람이 초월적인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무한한 능력을 되찾고자 함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런 모습은 자기 전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고유한 인격이나 개성을 추구할 수 없게 된 결과이다.

내장감각에서 피부감각으로 리비도 전환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고유한 인격과 나만의 삶을 찾아가는 성장에 대한 욕망은 자기 성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두 가지 초월


초월에는 두 가지 초월이 있다.

첫째,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신이 되고자 하는 초월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피땀의 노력 없이 거저먹으려는 시도를 좋아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둘째, 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타자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는 초월이다.

이런 초월은 외부세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며 더불어 성숙한 삶을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초월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장 감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두 번째 초월을 추구하는 사람은 피부감각에 머물러 자기 한계를 알아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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