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분열적 자리에 있는 이스라엘
최근 이스라엘은 1973년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축제일인 욤키프르(대속죄일)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을 때 오일쇼크를 주도한 사우디와 국교정상화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하마스가 승부수를 던졌다.
중동지역 평화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스라엘-사우디 국교 정상화에 하마스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인 하마스는 선전포고 없이 5000발을 로켓을 쏘며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다.
큰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난다.
무장한 하마스는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인질로 삼는다.
음악 축제가 벌어지던 공연장에 로켓을 쏘아 26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마스는 정식 명칭으로 이슬람항쟁운동(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이라고도 알려진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팔레스타인가자지구에서 행동하는 이슬람 민족주의 그룹이다.
주로 팔레스타인분쟁과 이슬람주의를 중심으로 한 성격적, 정치적, 군사적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하마스는 이슬람교 원칙에 따라 이슬람 국가를 성립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반항과 이슬람국가의 성립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세력이다.
아울러 팔레스탄인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정당조직이기도 하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인 이희수 교수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 독립을 위한 저항조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지정되어서 흔히 무장정파라는 표현을 쓰지만, 실질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없는 자치 정부다"
라고 말했다.
하마스는 인질극을 벌이며 잔인하게 인질들을 죽이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세워진 곳은 원래 자신들의 땅이며,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을 점령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마스는 원래의 자기 땅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저항하는 단체이다.
이번 충돌은 처음이 아니며, 그동안 둘 사이에는 수많은 충돌이 있어 왔다.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을 예고하면서 전쟁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금지된 '악마의 무기'인 백린탄을 사용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비난을 받고 있다.
2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에 전기와 물 공급을 끊음으로써 고사작전에 돌입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24시간 내에 가자지구를 떠날 것을 명령하여 유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24시간이 지난 후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피난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곧바로 그 지역을 공격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하마스의 기습공격을 잘못된 것인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보복은 지나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의 역사는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이전에 올린 글, <하나님의 임재 방식> 등 여러 글에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만나느냐의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유일신 하나님을 만나느냐? 또는 이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느냐?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느냐? 라는 주제가 그 핵심이다.
나의 글에서 이스라엘은 아직도 유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만 인정하고 있음이 강조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계시가 완성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성경은 오직 구약뿐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전쟁 양상은 '거룩한 전쟁(훼렘전쟁)'으로 일명 '멸절 전쟁' 또는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의 전쟁은 가나안 땅에 사는 여섯 부족을 멸하기 위해 하나님이 명령한 전쟁형태이다.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 6:21)
멸절전쟁의 양태는 오늘날 '인종청소'와도 같아 보이지만 그 이상이다.
그 전쟁은 가까운 이웃인 여섯 부족을 전멸시키기 위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다 죽이되, 가축까지도 죽이는 잔인한 전쟁이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그렇지만 하나님이 항상 훼렘 전쟁만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먼 이웃과 전쟁할 때는 남자만 죽이도록 되어 있다.
훼렘전쟁을 정신분석적으로 말하자면, 그 전쟁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철저하게 선과 악, 두 편으로 나누어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악으로 간주하는 전쟁이다.
공교롭게도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가까운 이웃에게 편집분열적 자리의 전쟁을 철저하게 치러내지 않으면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때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기독교인이라면 나를 비난할 것이다.
왜 하나님을 그렇게 비하하느냐라고...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히브리 백성들의 정신적, 정서적 수준이 그런 하나님 밖에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유아가 처음 어머니를 만날 때의 정서적 상태와도 같다.
어머니 자체의 심성이나 정서 또는 속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 안에 있는 나쁨의 리비도를 해소하기 위해 아기는 어머니를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로 나누어 나쁨을 나쁜 어머니에게 투사하고, 좋은 어머니로부터는 좋음을 내사한다.
이것은 생후 첫 6개월 동안의 유아의 정서적 호흡의 양태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서적 수준이 바로 이 수준이다.
하나님의 본래적 속성과 무관하게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서적 상태는 악에 대한 정서적 태도는 잔인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들어있는 시제는 '미완료'형이다.
즉 여호와는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전능자 하나님일뿐이다.
미완료형의 여호와 하나님은 성자가 성육신함으로써 실체가 나타남으로써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면, 유아가 6개월이 지나면서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벗어나 '우울적 자리'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이 유아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 수순이다.
유아는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6개월 동안 무자비하게 공격해 온 대상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슬퍼하며 우울해진다.
두 자리의 구별점으로, 아이의 마음 속에 대상에 대한 염려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머니를 둘로 나누어 한편으로는 무자비하게 공격한 어머니가 동시에 자신이 너무나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유아는 한 동안 두 어머니가 분열되어 있어 한 어머니를 편집적으로 공격해 왔는데, 이미 나의 폭격을 맞아 처참해진 어머니를 발견하게 되면서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우울해지는 것이다.
유아는 분열된 두 어머니가 아니라 한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한 동안 아기는 대상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되면서 애도를 수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물러 악으로 간주되는 적이 나타나면 자동적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울적 자리로 넘어올 기회를 만났지만 외면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주변의 연약한 이웃을 향한 대상에 대한 염려가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 앞에서 선과 악을 통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에수를 외면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지, 저렇게 연약하고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선과 악을 통합할 기회를 놓쳤다.
유대인들은 내 죄로 인해 죽음 당하신 하나님을 외면했다.
그들이 찾는 하나님은 오로지 전능자 하나님일뿐, 십자가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죽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이웃은 그저 처단해야 할 원수일뿐, 이웃에 대한 염려나 자비란 없다.
여리고 성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관련된 은유이다.
예수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가까운 이웃으로 분류되어 위기의 순간에 잠재적인 멸절 대상이다.
예수의 비유 안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인식 변화와 현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 유사점을 찾아보면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은 정서적으로 편집-분열적 자리에 있고, 십자가에서 낮아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전능자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스라엘인들이 구약의 정서에 머물러 있는 한, 가까운 이웃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조장하는 내러티브를 지속시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들이 이러한 내러티브를 지속시켜 나가는 한, 가까이 있는 이웃은 증오의 대상으로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인들은 가까운 이웃을 시한폭탄의 위협으로 여기며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불변하는 내러티브를 가지게 된다.
이스라엘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는 최소한의 방법은 탈리오의 법칙에 입각해 정당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즉 탈리오의 법칙대로 복수를 규제하여 지나친 보복을 하지 않음으로써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 유지를 위한 지역 세력간의 균형을 찾게 된다.
지금처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나친 복수는 하나님의 손을 심판의 칼로 되돌아 오게 할 수 있다.
탈리오의 법칙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으로써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벗어나 우울적 자리로 넘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웃에 대한 개념을 멸절의 대상이 아니라, 우울적 자리로 넘어오는 표지인 '대상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서>가 변하는 것이다.
그 정서의 변화에 대해 멜라니 클라인이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 넘어가 대상에 대한 염려로 충분히 애도하면 회복충동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한 번도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 넘어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구약의 멸절전쟁을 일삼고 있다.
물론 편집-분열적 자리에 있는 것은 하마스나 헤즈볼라, 이란, 시리아 등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정당한 복수와 과도한 복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모든 중동 국가들 관계에서 탈리오의 법칙에서 포용과 공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됨'을 받아들여 내러티브를 보다 성숙하게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내러티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친숙하지만 유대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그것은 구약시대에 가까운 이웃이란 멸절 전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멀리 있는 이웃은 어느 정도의 자비가 배려되지만, 가까운 이웃일수록 무자비한 폭력이 준비되어 있다.
최근에 하마스가 바로 그러했다.
예수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내러티브가 바뀌기 위해서는 전능자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연약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의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예수 당시의 가까운 이웃은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지금은 팔레스타인인들이다.
물리적 거리로는 가까운 이웃이지만, 위기 시에는 서로가 언제든 멸절의 대상이 된다.
나로서는 이스라엘의 정서적 미개함과 신앙적 퇴행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