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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안에 타자들로 가득 찬 청년 L(2)

타자 속에 묻혀 사는 L안에 일어나는 투사적 동일시

 (그림 설명 : 내면 안에 타자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 Dall-E 그림)

시험장에서 빤히 아는 정답을 못 맞히는 심리


L이 수능을 칠 때의 느낌을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외로운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수능장이다.


L이 수험장에 있을 때 자신은 마치 적진에 들어와 온통 적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L이 문제를 읽은 후 정답을 맞혔다는 생각이 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만일 어려운 문제를 풀면서 혼자 맞추는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답을 답안지에 옮기면서 다른 사람이 못 보게 손으로 가려야 안심이 되었다. 

다른 한편, 답을 맞혔다 싶으면 순간 허무감이 든다.

왜냐하면 답안을 쓰는 순간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내 안에서 빠져나가 자신이 내면이 텅 비어져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빤히 아는 답을 생각했다가 그 답을 답안지에 옮기는 순간 다른 답을 쓰기도 한다. 

그것은 정답을 맞힐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느낌 때문이다.


L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타자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자신은 그림자처럼 숨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순간 내 존재가 그들에게 발각되는 느낌이 들었다. 


돈을 벌면 불안이 가중된다


L은 대학을 졸업하면 어떻게 살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난다. 

주변에 돈을 못 벌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취직 못한 친구들이 있으면 자신이 다 도와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내가 다 도와주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살지? 그렇게 사는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 아닌가? 등등...


할 필요가 없는 걱정들을 하느라, 


   '차라리 내가 취직을 안 해서 돈을 안 버는 것이 속 편하겠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L은 빵 하나를 가지는 순간, 함께 나눠 먹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자동으로 떠 오르는 것처럼, 취직하여 월급을 받는 날이면 도와줘야 할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아 아예 취직하기를 접었다.


그래서 L은 졸업 후 취직대신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살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기는 L 


L 이 유아기에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우울증 때문이다.


잘 나가는 영화배우나 탤런트가 잘 걸릴 수 있는 병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들은 극 중 인물의 역할을 화려하게 해 냈지만 극 중 인물과 전혀 다른 '나'는 현실에서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 결과 둘 사이의 괴리감은 우울증을 부른다. 

배우가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는 역할을 강렬하게 해 낼 때, 초라한 '본래의 나'는 소외되면서 우울증을 불러 들인다.

 

배우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극 중 인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극 중 인물로 하여금 자기의 내면의 공간에 들어와 계속 살도록 해 주면 L처럼 자신은 제삼자의 자리로 물러나 타자들의 그림자로 살게 된다. 


배우가 극 중 인물에게 자기의 내면 공간을 내어주는 것을 갓 태어난 자녀가 보고 있다고 치자.

아기가 첫 1년을 그렇게 지냈다면,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기 내면을 내어주고 동일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L처럼 평생토록 남에게 자기 내면 공간을 차지하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L의 유아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시어머니에 예속된 삶을 살고, 시누이 눈치를 보면서 시댁이 원하는 대로, 남편의 요구에 맞춰 사느라 철저하게 자신의 본성을 버리면서 사는 것을 어린 L이 지켜보았다면, L은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습

L은 지금도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동일성 없이 자신의 내면을 어머니에게 내어준 공간에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들어오고, 이모도 들어오고, 형도 들어오고, 나중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온다. 

그래서 빵 하나가 생기면 나눠 먹어야 할 사람들이 자신 안에 다 들어온다. 




L의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온 신


L의 아버지는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주식 투자에 있어 달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주식투자로 큰돈을 벌어 본 적은 없다.

가까운 친척이 큰돈을 맡겨서 주식투자를 위임해 주면 그런 관리를 참 잘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돈으로 투자를 하면, 너무 빨리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가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버는 돈 보다 잃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본인이 투자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주식을 코치해 주고 감사의 금일봉을 받는 쪽을 선호하고 있다.


이런 아버지가 L에게 돈 100만 원을 주면서 주식투자의 길을 인도했다. 

매일 전화해서 어떤 종목을 언제 사고, 어떤 금액으로 사라고 하는 구체적인 지시를 한다.

아버지가 바빠서 코치하는 시간을 놓치면, L은 주가가 크게 내려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만다.

아버지가 지시한 종목 외 다른 종목을 사고 싶어도 아버지의 뜻을 감히 거스르지 못한다.

주식을 시작 한 후로 L 안에는 아버지가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들어와서 살고 있다. 

주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 대해 그동안 없던 아버지의 시선을 담고 있다. 

그때부터 L은 아버지의 눈으로 모든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가끔 드는 생각은 '혹시 내가 신이 아닐까?'이다. 

고교 시절 어느 날, 하나님이 L  자신 안에 들어오셨다는 강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가끔 드는 생각이 바로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생각이다.

이것 역시 자기 동일성이 부재한 탓에 자신 내면에 들어온 타자가 주체의 자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가 박태선, 문선명과 같이 스스로 하나님임을 자처하는 교주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행히도 L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 '그런 내 생각이 과연 옳은가?'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L에게는 이와 연결점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지고 살아가는 짐과 죄들을 내가 대시 지고 살아가야 사람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처럼 L의 일상은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타자들의 생각에 의해 휘둘리는 삶으로 이어져 왔다. 

모두 타자들의 투사적 동일시로 일어난 현상들이다.

물론 모든 타자들이 투사적 동일시를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L의 존재와 삶을 흔들어 놓았던,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어릴 때의 율법적인 설교로     must를 강조해 온 목사님 등 이 세 사람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지금 L은 상담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이 세 사람을 밀어낼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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