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아 안에서 타자로 가득 찬 청년 L (1)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해 투사적 동일시가 일상이 되다

동일성 결여로 제삼자가 된 자아


부산이 고향인 L 은 대학 3학년 재학 중이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L은 학교 근처에 있던 방을 빼서 다른 집으로 주거지를 옮겨야 한다.

멀리 있는 부모가 와서 이사를 돕지 못해 이모가 대신 차를 가져와서 짐을 옮겨 주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늘 가까이 있던 이모라 편한 관계이지만, L로서는 이모를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L 은 자기 동일성이 없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이 그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모는 L을 아들처럼 편하게 여기지만, L 은 속사정이 다르다.


동일성이 결여되어 가까운 사람일수록 L에게 가까이 오면 L 은 자신의 자아의 공간을 내어 주게 되고, 그 순간부터 나라는 자아는 구석으로 밀려난다. 

L은 이모가 하는 모든 말을 간섭이나 비난으로 듣는다.


이삿짐을 옮기는 중에도 이모가 내 물건에 손이 닿는 순간 L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 수치심은 이모와 성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성적 수치심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모가 L의 생각을 다 읽고 있는 것 같아서 다른 생각으로 바꾸느라 바쁘다.


이삿짐을 다 옮기고 나서 이모가 밥 먹자면서 L에게 식당을 안내하라 하신다.

어떤 음식점을 갈까 고민하는 중에, 그 생각이 이모에게 들킬까 봐 두렵다. 

L은 이 음식점을 가려니까, 그곳에서 불편해했던 일이 생각나고, 저 음식점을 가려니까 거기서는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불편하게 여겼다.  

L이 음식점을 정하지 못하자, 이모가 임의로 식당을 정해서 가자고 한다.

L은 또 고민이다.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L은 어느 누구도 안 하는 고민들을 혼자 심각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이 힘들어하는 것은 어디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순간에 아는 사람들이 동일성이 부재하는 L의 자아의 공간에 들어와 일시적으로 이런저런 생각과 말들로 헤집어 놔 버리기 때문이다. 


L은 이모와 만나는 시간 동안 최대한으로 말 수를 줄인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하는 만큼 나 만의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아 안에 타자가 불쑥 들어와 자아의 공간을 다 차지하고 L의 자아는 마치 숨어 있는 그림자처럼 생각하고 움직인다.


동일성 확보란?  


동일성은 유아기 1년 동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획득할 수 있다. 

동일성이라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 존재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위니캇은 유아가 동일성을 얻어 가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잘했다.

아기가 배가 고프면 울기 마련이다.

어머니는 아기의 울음이 배가 고파서 우는 것임을 간파하고 우는 아기의 입에 젖꼭지를 갖다 대면서 젖을 공급한다. 

처음에는 아기는 '내가 우니까 젖가슴이 내 입에 들어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시작한다.

이런 일이 수백 번 수천번 일어나면서, 아기는 환상 속에서 착각을 한다.

창조자가 되는 착각이다. 


'내가 젖가슴을 창조했다."


하는 전능자가 가질 수 있는 환상이다. 

아이가 이러한 전능자 환상을 충분히 누리고 나면, 그야말로 전능자의 이름을 획득한다.

그 이름은 바로, 


   I am.


이다.(모세 앞에 나타난 신의 이름은, <I am who I am>이다.

신의 이름 중 일부만 받는다.

주부와 보어가 같으면, 절대 동일성을 가진 신이 되지만, 사람은 절대 동일성을 가질 수 없다,

신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완전충족적 존재이지만, 사람은 서로 다른 보어로서 일평생 보충하며, 또는 일평생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I am A. 가 된다.(A의 자리에는 B, C, D..... 가 들어와 I am은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이렇게 동일성이 일어나면, "나는 있다"를 선언할 수 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나는 나다'

감히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또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고요한 나'가 있다.


동일시란?


이렇게 확보된 '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 중요한 대상의 어느 부분들을 동일시하여 나의 성격이 된다.

나의 성격이란 나의 동일성의 확장판이다. 

그런 성격을 가지고 'I am A''가 된다.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아이의 내적대상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일성이란 순수하게 나 자신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단세포에 미토콘드리아가 들어와 상호 공존하면서 다세포로 분화해 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생명체든지 혼자만의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경우란 없다. 

외부의 어머니가 내면화되면서 내면화된 어머니의 자리는 타자의 자리로 남게 되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타자들을 내면화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그는 단짝 친구를 만들 수 있게 되고, 사랑하는 연인을 내면화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자리에는 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내면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있다'라는 동일성을 확보한다.


동일시는 다르다. 

토마스 옥덴에 의하면([투사적 동일시와 심리치료 기법], 168) 중간대상은 자기와 대상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중간 대상이란, 생후 1년이 지나 'I am'(동일성)을 확보한 아이가 어머니가 자꾸 사라지는 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Pooh 인형으로 대표되는 대상을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 어머니를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어머니는 사라져도 되지만, 그 인형이 사라지면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다.


동일성은 어머니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동일시는 어머니를 외부대상화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 동일시하는 자리에 수많은 타자들의 특별한 측면들이 동일성의 연장측면으로 놓이게 된다. 

넓게 보면, 동일성과 동일시를 합쳐서 하나의 성격이 되고 새로운 동일성을 형성하지만, 동일시 측면이 동일성을 흔들어 놓거나 뒤섞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자를 동일시한 측면은 앞으로 자기성(I am A)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가 된다.  


동일성 결여로 타자의 그림자로 사는 L


L이 태어날 때 어머니는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죄책감과 연약함 때문에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는 얘를 잘 키워낼 자신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잘 키워 주세요' 하며 하나님을 대상화하여 아이를 제물로 바치듯이 드렸다. 

그리하여 L은 유아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내면화할 수 있는 자아 탄력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L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must(의무)를 많이 만들어냈다.

게다가 L이 다니던 목사님은 복음적인 설교보다는 구약의 율법적 설교로 L에게 종교적 의무, 도덕적 의무들을 많이 짐 지게 했다. 

동일성 확보가 안 된 상태에서 L은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 들어와 존재의 기능을 했다.

L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타자들에게 다 내어 줘야만 했다.

L 은 타자가 들어오면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늘 숨어 있으면서 그들의 언행을 지켜봐야만 했다.

수많은 타자들이 L의 허락 없이 마구 들어와 온통 비집고 지나가도 L은 구경만 해야 했다.

보통 동일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자기 공간 안에 들어오면 화를 내면서 그를 밀어내게 된다.

그렇지만 L은 타자들의 그림자 인격이기 때문에 화를 낼 수 있는 권리조차도 없었다. 

L은 자기 안에 들어온 타자들을 그냥 지켜보면서 기억 속에 기록을 해 놓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L은 자기 자신을 살리는 어떤 행동도 스스로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손에 빵 하나를 쥐게 되면, 일반 사람의 경우 그 빵을 맛있게 먹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가장 먼저 올라오지만, L은 그렇지 못했다.


   '이 빵을 누구에게 나눠 줘야 하지?'


라고 생각했다.

동일성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누구에겐가 말을 하게 되면 마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자신의 소중한 부분을 빼앗기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는 그림자 인격이기 때문에 자신의 어떤 부분도 타자에게 내어 놓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도 L 은 상담하는 중에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기억 속에 기록해 놓은 것을 안심하고 다 이야기하는 마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절 따라 우울해지는 사람들의 투사적 동일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