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 항진과 에로스 과다 증대
딸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한다.
아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모성애를 받기만 할 뿐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여성적인 것을 떨쳐 버리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반면, 딸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칼 융에 의하면, 여성의 모성 콤플렉스가 여성성 비대를 만들어 내면 모성 본능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여성성의 위축을 가져온다고 한다.
이런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남편은 자녀보다 부차적 존재가 되며, 자신의 고유한 인격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런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무의식 속에 잠겨 두게 되면서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만다.
자신의 삶은 오직 다른 사람 속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여성은 타자의 존재 안에 들어가서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가 자기 대신 살아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즉 이런 여성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의 삶과 자기 인격으로 해 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실현해 가게 된다.
나는 앞의 글( [플라톤의 [향연]7: 에로스의 현실 적용적 의미])에서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를 언급한 적이 있다.
아가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랑으로 '그 자체'(per se)를 가지고 있다.
즉 아가페는 사랑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의 사랑처럼 아가페는 줘도 줘도 아깝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자녀를 향한 모성애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에로스는 사랑의 본질을 가지는 대신, 농사의 신 Poros와 거지 신 Penia 간에 태어났기 때문에 풍요와 결핍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에로스는 모성애와 같은 일방적 사랑이 아니며, 쌍방 간 서로 주고받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아가페를 주지만, 남편과 아내 관계에서는 상호 에로스를 주고받아야 한다.
오늘날 에로스를 주고받지 못하는 부부가 많다.
아내는 남편을 통해 부부간 행복을 얻기 위한 자아실현을 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남편은 엄마 같은 아내와 결혼해서 아내 역할보다는 엄마 역할을 해 주기는 원한다.
아내는 여성성으로 살아본 적이 없기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편하다.
그 결과 아내는 남편과 에로스를 주고받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아가페를 주게 된다.
어머니 같은 아내가 남편에게서 아가페를 준 것은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에로스를 주지 않은 것은 되돌려 받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부관계는 더 이상 정서적 접촉 없이 갈수록 남이 되어간다.
오늘날 대부분 부부가 이러한 인생 여정을 밟아 가고 있다.
이런 어머니는 자녀에게 아가페를 줘야 마땅하지만, 남편에게 주기를 포기한 에로스를 자녀에게 주게 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에로스를 주게 되면, 어머니는 남편 대신 아들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자 할 것이다.
이런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며, 자신의 욕망을 남편대신 아들이 실현해 주도록 유도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의 삶을 장악한다.
이런 어머니는 아들의 존재 안에 들어가면서 마치 점령군처럼 진입해 들어가서 아들의 삶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요구한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아들의 일상생활 계획표, 공부 계획표, 인생 계획표를 짜준다.
엄마들끼리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친구를 만들어 주고, 여자 친구까지 연결해 준다.
뿐만 아니라 학교 성적을 관리해 주고, 부족한 부분은 학원과 잘 가르치는 학원강사까지 섭외한다.
아들의 학교 앞에서 차를 대기시켜 놓았다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아들을 실어다가 학원으로 이동시켜 주고, 학원과 학원 간 이동까지 책임지고 해 낸다.
어머니는 아들이 앞으로 들어갈 학교와 직장취업까지도 관리하며, 심지어 결혼할 대상까지 물색해 어울리는 짝을 찾아준다.
아들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주는 사랑이 아가페인지 에로스인지 분별하면서 받기는 힘들다.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아가페인지 에로스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머니에게 돌려줄 것이 있는가를 보면 된다.
부부간에 에로스는 동등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주고받음에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에로스라면 이제 어머니에게 되돌려 줄 것이 많아진다.
무의식적 에로스는 항상 권력으로 나타난다.
되돌려 줄 것이 많은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되돌려 줄 것이 많은 사랑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런 어머니는 그 폭력적인 권력으로 자녀를 삼키고,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모성 콤플렉스로 딸에게 에로스가 증대되면 모성본능 비대가 아니라, 모성본능의 소실로 나타난다.
보통 딸은 3~6세 기간 동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어머니와 동일시되면서 여자다움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에로스가 증대된 딸은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딸이 모성본능보다 에로스가 과다하게 증대되어 있으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매우 '신경 쓰이는 딸'이 된다.
이런 딸은 누가 봐도 아동기부터 티가 난다.
어머니가 보기에 '혹시 아버지를 유혹하지 않을까?' '지나가는 남자들이 유혹하지 않을까?' 늘 염려스럽다.
이런 딸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학교에서 금지된 화장을 하고, 교복치마를 미니스커트로 개조하여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딸은 사춘기에서 성인이 되어 가면서도 과도한 에로스를 주체하지 못하여 늘 애정행각을 벌인다거나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나 든다거나 하면서 늘 아슬아슬하게 행동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남자와 얼키설키 여러 연애 사건에 연루되기 일쑤이다.
때로는 이런 여성이 돈 많고 순진한 남자를 만나 팔자를 고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이런 여성의 많은 경우 지속적인 연애를 못하고, 이 남자 저 남자 옮겨 다니면서 여러 모양으로 구설수에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이가 많은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혼기를 놓치면, 나이 많은 유부남을 좋아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결되지 않은 채 넘어왔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적 금지를 깨는 데에 스릴을 느낀다.
오이디푸스 시기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했던 것이, 늘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다가 결국은 금지된 사랑을 스릴 있게 즐기는 방향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여성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슬아슬하다'는 단어이다.
늘 아슬아슬한 사랑을 하면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나 드는 스릴을 즐긴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딸을 둔 부모는 딸에 대해 늘 안심할 수가 없다.
성인이 되면서 부모는 그 끈을 놓아 버리게 되면서 모든 기대를 접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