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기사도는 귀족 출신으로서 무(武 )를 숭상하여 약자, 특히 여성을 보호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귀족은 영지를 상속하는 과정에서 영지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장남만 결혼시키고 ,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거나 편력기사로 떠돌아다니기 일수였다고 한다.
조선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면서도 무보다는 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다면,
일본은 전통적으로 수많은 전쟁신을 모시는 가운데 무를 숭상한 나라였다.
조선과 달리, 이렇다 할 만한 학문이 없었기에 무를 숭상할 뿐 무를 겸비할만한 문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일본의 ‘칼 문화’는 한 마디로 싸움의 문화이어서, 강자 앞에서는 쉽게 굴복하지만 약자 앞에서는 무자비한 심판자가 되는데 ,
그 대표적인 계급이 바로 <사무라이>였다. 그들은 자 신이 섬기는 다이묘에게 충성하였을 뿐 왕에게 충성하지는 않았다.
사무라이 중에는 모두가 다이묘에 속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소속이 없이 방랑하는 <낭인 >이라는 사무라이들이 많았다.
<낭인 >이 란 오늘날로 말하 면 칼을 차고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는 깡패들에 해당된다.
서양의 편력기사와도 비교할 수 있겠지만, 그 둘은 비교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덕성을 표방하는 편력기사와는 달리 사무라이는 일종의 깡패나 마 찬가 지였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계 속된 전국시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남자들이 죽고 과부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로 인해
사무라이라면 어떤 여자라도 강간할 수 있는 무한대의 특권을 다음과 같이 부여받는다.
1. 사무라이는 여자를 강간할 권리를 갖는다.
2. 여자는 사무라이의 강간을 반 항할 권리가 없다.
3. 여자는 강간을 당하면서도 좋은 신음 소리를 내야 한다.
4. 너 의 아내가 강간당해도 사무라이에게 반 항하지 못한다
5. 남편이 반 항할 시에 는 남편을 죽여도 좋다.
6. 사무라이에게 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면 더 욱 구체화 된다 .
여자들은 외 출을 할 때는 반드시 담요를 배낭에 메고 다녀야 했고 , 속옷을 입으면 안 되었다 .
여자가 길거리를 활보하는 중에 사무라이가 성을 요구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메고 있던 담요를 깔고 성적 요구에 응해야 했다 .
일본은 족보가 없는 나라이며, 족보는 오직 왕족만이 가지고 있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의 전국시대 이후 전쟁으로 부족해 진 남자의 수를 늘리기 위한 대책으로서 여성의 성을 완전히 개방하게 만들면서 이때부터 성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민 또 다른 여성 성개방 정책이 있다. 도심 곳곳에 설치한 여성용 소변기 사용이다.
이 소변기는 칸막이도 없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길을 가던 여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엉덩이를 까고 서서 소변을 보게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
[ 교토의 주택에는 측간앞에 소변통이 있어서 여자들도 그곳에 소변을 보았다.
부자집 규수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서 소변을 보면서 종이도 사용하지 않는다.
기녀들만이 종이를 가지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달에 6번 정도 소변통을 비어가는 것 같다.
두 세명의 일행이 지나가면 길바닥 소변통 앞에 서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소변을 보는데 창피한 기색도 없고 웃는 사람도 없더라.]
이 소변기가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선수촌에서 사용되어 호평을 받은 적이 있어 ,
2020년 도쿄 올림픽 때도 사용코자 하였으나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면서 철거하 였다고 한다 .
이처럼 음란한 문화 속에서 사무라이의 특권은 성적으로 마음껏 즐기는 것이었다 .
유럽의 편력기사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
편력기사는 여성성을 내면화하여 여성을 신성시하여 그렇게 내면화된 여성성을 기준으로 외부의 여성들을 대 한 것이다 .
그러나 사무라이들은 여성성을 내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을 외부로 투사하여 수 없는 강간사건을 일으키면서 삶을 즐겼다.
사무라이들은 내면에 있는 여 성성을 외면하고, 여성을 보는 쪽쪽 여성성을 외부로 투사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누구나 자기 안에 이성(異性)을 가지고 있다 . 자신의 신체적 성을 보완하기 위해 심리적 이성(異性)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
여자의 내면에 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animus)>라고 부르며,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아니마(anima)>라고 부 른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인격 발달을 거론 할 때 아니마 아니무스의 통합을 언급한다.
여자가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을 외면하고 대표 인격인 여성성만을 사용할 때 , 어떤 일이 일어날까 ?
그런 여자의 여성성은 한 마디로 <천박함 >으로 나타난다 .
술집의 마담 , 각종 유흥가의 도우미들은 아름다운 미모 를 가지고 있지만 그 미모에는 <천박함 >이 몸 전체로 흐른다 .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성적인 남자일수록 여 성의 천박함을 좋아한다.
남자의 지성은 이런 여성의 천박함에 쉽게 빠져 든다. 심한 경우,
남자는 자신의 지성을 내려 놓고 여성의 천박함에 목숨을 거는 경우까지 갈 수 있다 .
남자의 남성성은 어떻게 작동할까 ? 남자가 남성성을 극대화시키는 경우는, 전 쟁을 나갈 때이다.
전쟁을 나가면서 여성성을 대동하면 매우 불편해 진다 .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데, 적의 생명과 아픔을 공감해 주게 되면 적과 싸워내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게 되고 만다 .
그렇기 때문에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거의 남성성을 100% 가깝게 사용하여 본연의 임무를 감당해 낸다.
전쟁 중에 나타난 여자에게 내면의 여 성성을 닫아 놓았기 때문에 여성성을 외부로 투사하는 대로만 사용한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남자는 여자를 강간을 하는 것이다.
즉 여성성을 내면의 인격 안에 챙겨두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를 볼 때 인격적으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전쟁 중일 때뿐 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내면의 여성성을 돌보 지 못하고
여성성을 외부에 투사하는 데에 전념을 해 버린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여자에게 포악하고 잔인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런 사무라이들을 20여 만명을 데리고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은 순식간에 초토화될 수 밖에 없었다 .
이 런 잔혹함은 조선을 식민지화해 가 는 과정에서도 발휘되 었다 .
조선의 국모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을 주도한 사무라이들은 단순한 낭인들 , 깡패의 무리가 아니었다.
자객 들 중 시바 시로는 하버트 출신의 현직차관이었고,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동경제대 출신의 인테리였으며,
아다치 겐조(아래 사진 중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는 당시 한성신문사 사장으로 나중에 장관이 되는 자이다.
(사진출처 : 유튜브.[역덕이슈 오 늘 | 1895 년 10 월 8 일 , 을미사 변 일어나다 ])
이렇게 볼 때 , 우리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현재의 일본 , 또는 일본인의 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면
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무라이 문화는 오늘날 야쿠자 조직 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인, 문화인 , 예술인 전반에 걸쳐 있다. 사무라이들의 성적 행각의 역사를 살펴보면 ,
오늘날 일본의 음란한 문화, 포르노 문화가 한 시대의 요청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
심리학적으로 볼 때 , 일본의 남성들이 유럽의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성을 내면으로 인격적 요소로 보유하지 못하고
외부의 여성에게 여성성을 투사하는 데에 급급한 사무라이들의 행각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가장 많이 영향받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 남자들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람의 인격을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자기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이며,
그 둘의 관계가 얼마나 잘 통합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남성에 있어 여성성은 이웃이다 .
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그 남성의 인격발달에 있어 결정적 요소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웃 조선의 여성성을 제거하였다. 마치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지나가는 여성을 세워두고
길거리에 담요를 깔고 그 자리에서 강간하듯이 여성적인 나라의 국모를 강간하고 살해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