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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편력기사의 내면화된 여성성





                     유럽 편력기사와 일본 사무라이


유럽 중세의 편력기사와 일본의 사무라이는 외양은 비슷하나, 행동 면에서 다르다.


 외양으로 볼 때 둘 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한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그들은 칼의 힘으로 불의에 대해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편력기사나 사무라이는 오늘날 사법부의 역할, 검찰과 판사,


변호사의 기능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권한을 가진 것이다.







유럽의 편력기사와 일본 사무라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무라이는 칼을 들고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무자비하고 잔인한 심판자가 되지만,


편력기사는 공평한 판결을 내리며, 자신의 판결에 저항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그때 창을 든다.


두 집단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사로서 공히 남성성을 적극 활용하지만, 남성성의 성질이 각기 다르다.


 이 장에서는 편력기사가 남성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력기사의 남성성 내면, 여성성



 편력기사는 대외적으로 남성성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여성성을 지렛대로 삼는다.


 편력기사를 자처하면서 세계를 편력하는 기사들은 기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사도 정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칙 중 하나가


 <이상적 여인에 대한 영성 깊은 사랑>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신화 연구가 로버트 A. 존슨은 이러한 사랑을 <courtly love>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중세적 여성성의 절대적 모델상으로서 성모 마리아이다.


편력기사들은 자신의 신앙적 대상인 성모 마리아 상에 걸맞은 대상을 현실에서 찾아 그 여성을 신성화한 후,


그 여성을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금하고, 마음속 깊이 흠모하는 형태로 대상화한다.


 이 여성은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부인이기 때문에 유부녀이기도 하다.


기사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상사 기사의 부인을 신앙적인 형태로 사모한다.


기사들에게 이 여성은 ‘귀부인’이다. 현실에서의 이 ‘귀부인’은 자신이 어떤 기사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편력기사뿐 아니라 일반적인 기사는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권한을 부여받은 신분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내면의 덕목이 바로 이 신성화된 여성성인 것이다.


 편력기사는 바로 이 내면의 여성성이 주는 힘으로 1년의 대부분을 황무지와 사막에서


지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무미건조한 삶을 풍요롭게 살아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편력기사가 내면의 여성성을 구비하게 됨으로써 남성성의 호기나 객기에 요동하여


분노와 원한 감정을 자제할 수 있게 되고 정당한 사회정의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편력기사의 사회정의 집행의 공정성 근거; 여성성



 편력기사가 사회 정의를 집행할 때, 돈키호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앞에 있는 듯 그녀에게, 어려운 상황에 빠진 자기에게 도움과 보호를 내려 주십사

부탁이라도 하듯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돌린다는 것은 이미 편력 기사의 관습과 상례가 되어 있다오”


어떤 사람이 돈키호테에게 묻는다.

 “두 기사가 서로 말을 주고받던 중 한마디에 분노가 끓어오르면


 말머리를 돌려 서로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섰다가 다짜고짜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다시 만나러 옵디다.


 달리는 와중에 그들의 ‘귀부인’에게 가호를 빌더군요. …  


저는 편력 기사 모두에게 일신의 가호를 청할 귀부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이 다 사랑에 빠져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때 돈키호테는 단호히,


 “그렇지 않소.  사랑하는 귀부인이 없는 기사는 있을 수 없다는 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늘에 별이 있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사랑 없는 편력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기 때문이라오.


만일 사랑 없는 기사가 있다면 그는 정식 기사가 아니라, 가짜로 취급받았을 것이요.”


편력기사가 여성성을 내면화하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면, 가는 곳마다 분노하고,


파괴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며, 공정한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권력과 힘을 갖춘 남자가 남성성만을 가지고 자신의 권한을 행세하게 될 때


이런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남성성을 남자답게 화끈하게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강력한 근육적 힘의 가치를 절대화할 때,  자아 팽창 또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변에 있는 여성들의 여성성, 남성들의 여성성은 상처를 받게 된다.




돈키호테에게 묻는 위의 질문 중에, 두 기사가 대결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상대방이 여성성을 충만하게 내면화시키지 못해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어


공정한 판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롭지 못함, 불공정함, 배려심의 부족 등에 대해


예민한 여성적 감정으로  분노를 끓어 올려 상대방을 심판하고자


말과 창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편력기사는 신성한 여성성을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 여신에게 봉사하는 종으로 여기며


신성한 여성이 가진 분별력으로 세상의 상황을 판단한다.


 나르시시즘이나 편견, 사태 판단의 왜곡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공정한 기사로서 명예를 금과옥조로 삼는다.




편력기사들은 자기 안에 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 지혜로 판단할 뿐,  집단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내면에 여신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면에서 편력기사들의 기사도 정신은 거의 종교적 헌신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편력기사들은 (중세적 개념에서) 성모 마리아를 숭상하는 헌신적 태도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종교적, 사회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사랑 없는 정의는 합리적이지만 파괴적일 수 있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유연하지만


경계를 허물어뜨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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