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0 세기의 유레카! 남자 안에 여성성 발견

현대사회에서 남자로 사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가부장적 남자의 위상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1막 2장에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을 여자다'


여자는 결코 약하지 않다.

여자의 약함은 중년기에 진입하기 이전의 모습이다.


                            부실한 자! 그대 이름은 남자



남자가 중년을 지나고 있거나 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여자를 이렇게 보고 있다면, 그는 아직 철이 덜 든 남자임에 틀림이 없다.

중년이 되어도 여자를 약하다고만 생각하는 남자는 여자를 약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이 끊임없이 보호해 줘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남편의 역할은 아내의 울타리를 쳐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약한 위치에 고정시켜 놓고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 부부는 결혼의 의미를 놓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수법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써먹어 온 전략이다.

가부장적 질서를 제도화시킨 후 여성을 억압하여, 여자는 스스로 자생할 능력이 없으니 남자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 전략을 수천 년 동안 구사해 왔다.   


이렇게 견고하던 가부장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부터다.

여권 신장과 양성평등의 물결이 들이닥치자, 여자의 본래 실력과 남자의 민낯이 드러나고 말았다.


셰익스피어가 지금 살아서 오늘날의 남자를 보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부실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다'


                              가부장 권위의 약화



남자는 왜 이렇게 부실해졌는가?

부실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 부실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이 부실함을 가부장 문화로 감출 수 있었던 것뿐이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의 부실함을 어떻게 감출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여자를 억압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오늘날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가부장 제도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가부장 제도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가부장적 질서는 계속될 것이지만 그 위상은 여기저기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는 [무쇠 한스 이야기]에서 이러한 변화를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제2 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를 지나면서 남성의 본질과 남성이 가진 책임감은 명확하였지만, 남성들의  사고는 고립적이고 편향적이어서 이대로 계속 가면 위험스럽다는 반성이 일어났다.

1960년대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전쟁으로 정당화되는 남성들의 폭력성에 대한 재고가 일어났다.


블라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지적을 한다.


"여권 신장으로 남성들은 여성을 다시금 보면서 오십 년대 남성들이 회피했던 문제와 고통을 자연히 알게 되었다. 여성의 역사와 여성의 감수성을 헤아리는 가운데 일부 남성들은 자기 안의 여성성을 알아차리고는 거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

이분법의 역사는 매우 길다. 소크라테스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오늘날까지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분법은 곧 남성적 사고이기 때문에 남성 본질과 딱 맞아떨어진다.

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이다

그의 저서 [선악을 넘어서] 서문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진리가 여자라면..."


지금까지 진리는 남자였으나, 니체는 진리의 자리에 여자를 앉혔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그렇게 2500년의 철학의 역사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이분법은 철학 분야뿐 아니라, 제반 영역에서 적용되어 왔다.

선과 악, 빛과 어두움, 남자와 여자, 천국과 지옥 등 수없이 나열될 수 있다.

그런데 니체와 같이 진리의 자리에 남자 대신 여자를 앉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선과 어느 정도의 악, 어느 정도의 빛과 어느 정도의 어두움이 서로 섞여 있는 상태를 상정할 수 있어야 현대적 사고가 가능하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사고가 시작된 것이 1990년대 세탁기 광고에서 나온 퍼지이론(Fuzzy Theory)이다.

퍼지 이론은 세탁기에서 시작하여 퍼지 카메라, 퍼지 밥통 등 각 분야에서 이용되어 오던 중 지금은 인공지능 개념으로 이를 대체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상청에서도 '비가 온다' '비가 안 온다'라는 기상통보를 해 오다가, 최근에는 '비가 올 확률이 70%입니다'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분법적 방법에서 퍼지식 방식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남자이기만 하던 남자가 지금은 남자 안에는 여성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자 안에는 남성성이 있다.


  아니마(남자 안에 여성성), 아니무스(여자 안의 남성성)


일찍이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은 프로이트의 제자였으나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에 반발, 프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심리학을 만들어 냈다.

융 심리학은 오늘날 <분석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심리학은 '중년기 심리학'이다.

융 심리학 이론의 핵심 중에 아니마, 아니무스 개념이 나온다.

남성은 100% 남성일 수 없으며,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융은 그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불렀다.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으로 융은 <아니무스>라고 불렀다.  

아니마 아니무스론은 심리학 안에서만 통용되어 오다가, 사람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람 안에는 남성이나 여성으로서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도 함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자기 안에 있는 이성을 '아니마' '아니무스'라고 부르는 것이 복잡하게 여겨질 때는 한 단어로 '심혼'이라고도 부른다.

남자는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함으로써, '부실한 남자'를 극복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권의 역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