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불행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아이도 존재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기 전부터 존재한다.
남자가 한번 사정할 때 1억 개가 넘는 정자 중 서로 경쟁하면서 가장 먼저 난자에 도달하는 정자만이 수정되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이 경쟁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랑스 아동정신분석가 프랑수와즈 돌토(Franscoise Dolto)에 의하면 존재 욕망이 강한 정자는 수정되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아이들에 대해 언급한다.
"내가 분명히 아빠 몸 안에 있었는데, 어느 날 엄마 뱃속에 들어가 있더라"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고관대작의 아들로 태어나건, 범부의 자녀로 태어나건, 사생아로 태어나건,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건 그 아이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랑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이 필요충분조건으로 채워져야 한다.
요즘은 부모의 조건이 자녀의 사회적 성공을 좌우한다.
2000년 전까지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통했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격언이 되어 버렸다.
몇 년 전, 스스로 흙수저로 자처하며 도무지 금수저와 은수저를 이길 수 없다고 비관하며 자살한 서울대 학생이 있었다.
사실상, 그는 갖출 것을 다 갖춘 청년이었다.
서울대를 다닐 만큼 머리도 있었고, 아버지는 대학교수였으며,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이 정도면 금수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는 더 나은 부모 조건을 가진 친구들과 비교하며 늘 비관하는 가운데 존재욕망을 스스로 죽여 버린 것이다.
고대에는 버려진 자들이 나라를 세웠다.
나라를 세운 영웅들은 하나같이 버려진 자들이었다.
나라를 세운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때 그 공간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신화화된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가 신화화되기 위해 반드시 버려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위대한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성배를 찾아야 한다.
그는 그 성배를 찾아 아버지에게 제시함으로써 아들로 인정받아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되어 나라를 건국한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그랬고, 아서왕 신화에서 갤라하드(Galahad), 페르시발(Percival), 란스로트(Lancelot)와 같은 기사들이 아버지로부터 버려졌지만, 성배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들은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불가사의한 여정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아버지 부재의 신화를 극복한다.
유아기에 버려진 아이들 중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할 선택을 스스로 한다.
그들은 버려진 자이기 때문에 출생의 불행을 극복하고자 더 큰 존재 욕망을 동원하여 삶의 에너지 원으로 삼는다.
버려진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성배를 찾아야 한다.
성배란, 외관상으로는 예수의 거룩한 잔을 의미한다.
성배의 형식은 거룩한 잔이지만, 성배의 내용은 그 안에 담긴 포도주(예수의 피를 상징)이다.
그래서 성배를 찾는다는 구원을 상징하면서,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성배는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사람이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성배를 찾음으로써 실현된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성공을 성배로 삼았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났다', '미꾸라지 용됐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페르소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성배로 삼아왔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and the Raiders of the Lost Ark)에서는 주인공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성배를 찾아 나서면서 여러 가지 아슬아슬한 모험을 보여준다.
즉 잃어버린 여호와의 <언약궤>를 찾는 것이 성배 찾기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존재 욕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걸쳐 성배를 찾고자 한다.
남자는 성배의 성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래서 남자들은 사회적 지위, 권력, 재력을 압도적으로 갖춤으로써 페르소나를 강화하려고 하는 형태로 성배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자신이 찾는 성배로 착각하다가 은퇴하는 시점이 되면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게 되면서 내면적으로는 급격하게 어린아이로 퇴행하고 가정 내에서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닌 손님으로 전락한다.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면서 '공허하다' '외롭다' '허무하다'라고 혼자 외롭게 부르짖는다.
이렇게 비명을 질러도 소용이 없다.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성배는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결혼이 곧 성배의 잔이요, 성배 안에 있는 포도주는 곧 여성성이다.
파르시팔의 신화로 들어가 보자.
파르시팔은 왜 성배의 성에서 실패하는가?
그것은 모성 콤플렉스를 상징하는 어머니가 손수 짜준 외투를 벗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르치팔은 중요한 순간에 명료함과 힘을 잃어버리고 물어야 할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만다
우리 사회의 남자들은 어머니가 짜준 외투를 벗지 못한 채, 사회적 페르소나와 사회적 성과를 통해 성배를 찾고자 헤매다가 가정으로 돌아온다.
가정으로 돌아와서도 결혼 생활이 바로 성배이며, 자신의 아내가 바로 성배의 내용(포도주, 여성성)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만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태어나서 사회적 페르소나를 성배로 여기다가 가정으로 돌아와 가정이 성배이며 여성성이 성배의 내용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배를 찾지 못하면, 이 땅에 존재하고자 했던 욕망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배는 부부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태원은 희대의 바보다.
이건희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했지만, 최태원은 '마누라와 자식'만 바꿨다.
그래서 천하의 조롱거리가 되었는데도, 이 바보는 여전히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엉뚱한 곳에서 성배를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