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성 감소, 여성성 발휘
앞의 글 [이대남이대녀가 결혼 못하는 이유]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즘 젊은이들 간 결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남자는 역가가 낮은 반면, 여자는 역가가 높다는 데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남자들은 조선시대나 2000년 이전이나 이후나 의식의 변화가 거의 없다.
어느 나라나 남자의 문제는 '영원한 소년'이라는 데에 있고, 여자의 문제는 '어머니와의 동체성'에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어머니와의 동체성'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반면, 남성들은 '영원한 소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젊은 여성일수록 부모세대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가부장적 문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역가가 높은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어머니의 치열한 갈등상황을 봐 온터라, '나는 더 이상 엄마 같은 인생을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라는 자각이 높다.
그 말은 곧 '나는 어머니처럼 모성성만 사용하면서 자기 인생을 챙기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자각과 다짐이 된다.
그래서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사용해 오던 것을 멈추고, 여성성을 사용하게 된다.
젊을 때부터 여성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다짐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조금도 손해 보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대부분 남성은 '영원한 소년'으로서 여성으로부터 '모성적 돌봄'을 원한다.
남성은 밖에서는 어른의 페르소나를 확립하여 성숙한 모습으로 사회적 역할을 잘해 내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영원한 소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연애할 때부터 여성성을 갖춘 여성보다는 어머니 같은 아내를 원한다.
모성성이 풍부한 여성일수록 남편이 좀 못났어도, 여러 면에서 좀 부족한 부분이 많아도, 또는 정서적인 결핍이나 상처가 많아도, '내가 보완해 주고, 채워주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연애 및 결혼에 임한다.
그런 여자를 만난 남자는 밖에서 돈만 잘 벌어오면 만사 오케이였다.
남성은 밖에서는 근엄한 상사일 수 있지만, 안에서는 아내 앞에서 아기짓을 한다.
머리가 좀 큰 자녀들은 아버지를 걱정한다.
"아버지가 저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것 가지고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 내실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는 집안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한동안 모성적 역할을 하느라 좋은 시절을 다 보낸다.
아내는 '영원한 소년'으로 아기짓하는 미성숙한 남편을 섬기다가 중년기 중반이 넘어가면서 억울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성성을 놓고, 여성성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본성인 여성성으로 살지 못하고 모성성만 가지고 살아왔다면, 갱년기 넘기기를 너무 힘들어한다.
하루 종일 화가 나 있고, 얼굴은 별 사건 없이도 울거락 불거락하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른다.
그동안 아내의 희생으로 한 가정이 온전히 꾸려졌다.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견고해지고 있고, 자녀들은 그 어려운 공부를 잘 감당하여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전역했다.
모두 아내가 모성성을 잘 발휘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어머니를 지켜본 자녀, 특히 딸은 어머니가 안쓰럽다.
지금의 20대, 30대 초반의 여성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딸은 다짐한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래서 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지 않게 되고, 바로 여성성으로 살고자 한다.
어머니 세대에서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면서, 남자들의 미성숙함을 많이도 커버해 주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대녀들은 모성성을 거부하고 바로 여성성을 사용한다.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부족함과 미성숙함을 여자의 '모성성'에 호소한다.
어릴 때부터 모성성을 포기하고 여성성으로 살아온 여성은 이런 남자를 볼 때마다 구역질 난다.
여성들은 이런 남자를 보면서,
'너무 어리고 유치 찬란해서 함께 있는 것이 역겹다'
고 말한다.
자기 또래의 이 남자 저 남자를 다 만나 봤지만, 자기가 원하는 정서적 수준에 도달해 있는 남자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보다 성숙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
그동안 낮은 눈으로 자기 주변의 남자, 자기 또래의 남자만 바라보다가, 눈을 높여 자기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는 남자를 찾으니까 자기 수준에 맞는 성숙한 남자가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그런 남자는 자기 또래에는 없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성, 아버지 뻘의 남자에게서 '성숙한 남성'을 발견한다.
그 남자는 사회적으로 어른 노릇을 하고, 부하들에게 권위 있는 상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이다.
자기 또래의 미성숙한 남자를 만나 속이 뒤집어지는 일도 없는 성숙한 남자 앞에서는 모성성을 드러낼 필요도 없고, 바로 여성성을 사용할 수 있다.
그 남자는 말에 권위가 있고, 남성적이며, 사회적 위치가 확고하여, 또래 남자들처럼 여성에게 불안의 요소를 제공하는 경우가 없다.
그냥 믿고 의지하며 나의 여성성을 가지고 그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된다.
그는 젊은 여성을 볼 때마다, 또래 남자가 안 해 주는 말을 해 준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라고 말하는 말에 자기가 여성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여성은 이 아버지 같은 남자와 친밀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앙탈을 부려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예전에 사용해 본 적이 없던 '애교'를 부린다.
상황마다, 장소마다 다른 애교를 개발해서 '예쁜 짓'을 하면 남자는 '눈에 넣을 듯이 예뻐해 준다'
여성은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불안도 없어지고, 이런저런 고민도 없어지면서 나중에는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마비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남자는 아내가 있고, 슬하에 자녀를 여럿 두고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자녀들 중에는 이 여성과 또래의 딸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부남이 이 여성에게 용돈도 주니까,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늘 짜증 나게 하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는데, 이 돈 많은 유부남이 집도 마련해 준다.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맛본 것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미성숙한 남자는 절대 안 만날 거야"
"나는 엄마처럼 억울한 인생을 살지 않을 거야"
평소에 외쳐 왔던 구호가 이 돈 많은 유뷰남에 의해 실현되었다.
이 여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성숙해 보이는 유부남이 아내와 자녀가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순간 '영원한 소년'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여성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힌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인질로 잡은 납치범이 내게 온갖 감언이설로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에 반하여 그 납치범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납치를 했다는 그 사실이 나쁜 것인데, 납치 후에 잘해 준다고 해서 그를 벙어해 주고, 칭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 나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인데, 이러한 나쁜 사랑관계에서 내게 잘해 준다고 해서 감동해하면, 가치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그 여성은 그 유부남에게 이미 인격적으로 예속화된 것이다.
그 여성은 이미 인격을 빼앗겼기 때문에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냥 외형적으로 잘해 주는 것에 만족하면서, 인격 및 인격적 관계를 포기한 것이다.
이 모든 잘못된 상황은 자신 안에 있는 모성성을 잘라내고, 여성성으로만 살겠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여성성만 발휘하면서 사회적으로 성숙한 남자를 만나 사랑받을 수 있고, 모성성을 잘라 내었으니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거기에 가장 걸맞은 관계는 유부남의 상간녀가 되는 것이다.
이때 그녀의 여성성은 여성성인 것은 맞지만, 숙성되지 못한 여성성인 것이다.
여성에게 모성성이 필요한 이유는 모성성은 여성성을 숙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대녀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점 안에는 그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시한폭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모성성의 부재이다.
그래서 결혼 후에는 요리를 못해 항상 외식으로 끼니를 떼우게 되고, 자녀를 낳을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후회하면서 시험관 아기를 시도해 본다거나 한다.
아기를 낳고도 아기를 양육할 마음이 부족해서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맡길 생각부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