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 가는 데에는 셀프와 에고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없이 뭔가가 해결된다고 해도 궁극적인 해결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의 성숙이나 삶의 변화, 관계의 발달, 증상의 치유 등의 지점에 있어서도 셀프와 에고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셀프와 자아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완전한 이해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도 속사람과 겉사람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4-25)
위의 성경구절은 곧 셀프와 에고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에고를 이야기할 수 있어도, 셀프를 이야기하기에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이 한마디면 딱 정리가 된다.
셀프는 어거스틴이 발명한 개념이며, 그는 <셀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면, 나는 내 삶과 몸에 대한 주체일 수 있지만, 내가 내 몸과 내 삶의 주인은 될 수 없다. 누군가가 로봇을 만들었다면, 그 로봇이 자신에게 설정된 움직이고 작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주체로 가질 수 있지만, 로봇이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칠 수가 없다. 그 로봇을 만든 주인, 또는 설계자가 고장 난 로봇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에고는 고민하고 치료법을 여기저기 찾으러 다닐 수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치료할 수는 없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이 바로 셀프이다.
셀프는 내 안에 있는 것이지만, 내 밖에도 있다. 식당 정수기에 있는 물은 셀프이지만, 식당 종업원이 내게 물을 따러서 갖다 주기도 한다. 그 종업원이 내 셀프의 연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친구랑 등산을 가서 셀카를 찍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내 셀프의 연장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셀프는 타자와 연결되어 있고, 그 타자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식물일 수도 있고, 광물일 수도 기계일 수도 있다. 더 넓은 장으로 보면, 나의 셀프는 온 우주로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신과도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셀프(self)’라는 말은 단지 ‘자기 자신’이라는 뜻을 넘어선다. 그것은 내 안에 있으나 나보다 더 큰 어떤 중심, 나를 나이게 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자기소개를 위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통째로 건드리는 신학적이며 실존적인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Augustinus)**은 셀프 개념의 발명자라 불릴 수 있다. 그는 심리학적 언어가 탄생하기도 전,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고, 고통과 욕망, 회한과 은총의 궤적을 따라 자신을 응시했던 최초의 자아 해석자였다. *고백록(Confessiones)*은 단순한 회개의 기록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현대적인 자아 개념의 원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셀프와 하나님, 내면과 초월, 인간과 신의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고대의 영혼 이해를 넘어서는 사유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내면을 응시해야 하고, 나를 진정 알기 위해 하나님 안에서 나를 만나야 한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다. 나라는 존재는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ego)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셀프(self)’**라는 사실을 어거스틴은 최초로 사유했다. 셀프란, 타자 없는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초월적 타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실존의 중심이다.
에고는 혼자서 존재할 수 있다. 자아는 경계 짓고, 방어하고, 타자와 거리 두며 ‘나’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셀프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셀프는 관계 속에서 자라난다. 셀프는 자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외부 세계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신과의 관계 안에서 작용한다. 사랑받음, 들음, 응답됨, 타자의 눈에 비친 나를 통과해야만 자라나는 내면의 중심이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이라는 것은 곧 셀프에 대한 규정이자 규범이다. 어느 누구도 셀프 없이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사람은 내면을 셀프를 아는 만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 셀프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셀프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마치 남의 이야기 듣듯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에고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혼자만의 에고로 존재할 수는 있어도, 절대 혼자만의 셀프로 존재할 수는 없다. 셀프는 반드시 누군가의 응시,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의 은총 속에서 형성된다. 어거스틴에게 그 ‘누군가’는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는 고백한다.
“주여,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에고는 혼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에고가 자족하려는 순간, 셀프는 고요히 침묵한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셀프를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내면적 연결을 차단하는 자기 폐쇄다.
결국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깊은 통찰은 이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하나님 안에서만 드러난다.”
그리고 이 고백은 지금 여기, 내 안에서 셀프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모든 존재에게 열려 있는 부르심이다.
위에서 한 어거스틴의 고백,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맥락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커다란 우를 범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이다. 그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초인은 셀프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옆으로 스쳐 지나감으로써 셀프를 만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초인은 곧 니체의 자아상이다. 니체는 셀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말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과 연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아 혼자 최고의 기능을 끌어올리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볼 때, 니체의 초인은 일종의 '자아 팽창'에 해당한다. 자애팽창은 [자라투스트라] 내의 초인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 니체는 자아팽창이 심신 간에 폭발지점까지 이르레 되면서 식물인간 상태로 전락하게 되고 약 10년간을 그런 상태에서 지내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고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육체의 질병도, 감정의 불안도, 반복되는 인간관계의 실패도 그 뿌리를 더듬어가다 보면 결국 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자아(ego)와 셀프(self)의 괴리이다.
자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나의 방어체계이자, 기능적 중심이다. 나는 자아로서 타인과 소통하고, 일상을 유지하며,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셀프는 자아보다 더 깊은 차원의 ‘나’, 존재의 근원이자 내면의 진실을 품고 있는 중심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셀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의 존재적 뿌리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깨어나는 내면의 본질이다.
타락 전의 아담과 하와의 자아와 셀프는 하나였으나, 타락 후 이 둘은 분리된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기대, 부모의 욕망, 문화적 규범, 트라우마, 실패, 수치심, 억압된 욕망 등은 자아가 점점 셀프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에고는 사회적 기준에 따라 ‘적당한 나’를 연기하고, 셀프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침묵 속에 갇힌다. 그렇게 둘 사이에 틈이 생기면, 인간의 내면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이 둘 사이의 균열은 결국 증상으로 드러난다. 우울증, 불안장애, 편집증, 분노조절장애, 성격장애, 중독 등은 모두 자아가 셀프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때 발생하는 신호다. DSM-5에 실려 있는 수많은 병증들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울증은 자아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셀프로부터 받지 못할 때 나타난다. 자아는 움직이고 있으나, 그 안에 존재의 동력이 없다. 반대로 편집증이나 성격장애는 자아가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방어를 강화하여, 셀프의 여린 감각이나 진실된 고통을 철저히 억누를 때 나타난다. 모든 증상은 그 자체가 고장이라기보다는, 셀프를 떠난 자아의 외로운 신호다.
그러므로 치료는 병 그 자체를 ‘고치겠다’는 접근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에게 젖은 옷을 벗기면 괜찮아질 거라 믿는 것과 같다. 증상은 자아와 셀프가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이끄는 경고등이다. 이 경고등을 끄는 것이 치료가 아니라, 그 불빛을 따라 셀프를 향해 귀환하는 여정이 치료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무의식을 억압하고 있을 때 병이 생긴다고 보았고, 융은 자아와 셀프의 분리를 인간의 근원적 병리라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 언어로 이 이야기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셀프란 곧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내 안에 숨결로 부여하신 ‘참 나’이다. 자아가 셀프와 분리된다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단절이며, 존재 전체의 균열이다.
그러므로 치료란 자아가 셀프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 돌아감은 단순한 심리적 통합을 넘어, 존재의 진실로 귀환하는 신비로운 여정이다. 자아는 셀프 앞에서 무릎 꿇고, 자기 연약함과 비틀림을 고백해야 한다. 그때 셀프는 조용히 말한다. “네가 누구인지 나는 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에고는 해방되고, 삶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