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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자아의 소비와 자아이상의 소비

이상적 자아, 소비, 그리고 진정한 품위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지금 이 모습’에만 머물지 않는다. 마음속에는 늘 ‘내가 되고 싶은 나’—이상적 자아(ideal self-image)—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이상적 자아는 때로는 더 단정한 나, 더 성숙한 나, 더 지혜로운 나로 상상되며, 삶의 방향성을 이끈다. 이러한 이상적 자아의 모습은 때때로 소비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이 모습'에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노력한다. 옷, 가방, 시계, 자동차—우리는 다양한 물질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고, 타인에게 보여주고, 자기 안에 있는 열망과 부족함을 해소하고자 한다.


소비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소비는 단순히 경제적 활동이 아니다. 소비는 곧 자기표현이다. 사람들이 패션에 민감한 것은 단지 유행을 따르기 위함이 아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떤 옷을 고르는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어떤 분위기의 스타일을 연출하는지는 모두 자아 이미지와 이상적 자아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는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패션은 곧 자기 정체성의 코드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옷을 통해 ‘나’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외면의 장식이라기보다는, ‘이런 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의 몸짓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외형에만 머문다면, 그 소비는 곧 피상적인 자기 과시에 머물 위험이 있다.


자아이상으로서 자기 품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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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자아는 결코 화려하거나 비싼 모습만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타인에게 존중받는 사람’, ‘자기감정을 품위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적 자아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짜 자아이상의 핵심은 ‘품위’라는 내적 가치에 있다.


‘품위’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련된 외모와 고가의 명품이 품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품위는 자기 삶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스스로의 내면을 존중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삶을 정돈되게 이끌어가는 힘이다. 때로는 말 한마디, 적절한 거리감, 신중한 선택이 그 사람의 자아이상을 드러낸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 이상은 소비를 통해 포장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넘어선 자기 절제, 선택의 정돈, 물질을 다루는 태도에서 표현된다. 이때 비로소 소비는 자기를 흉내 내는 연극이 아니라, 삶의 품위를 구성하는 진실한 언어가 된다.


하자만 잠깐!! 자아이상 관점의 소비라고 해서 반드시 품위를 지켜 주는 소비는 아니다. '돈을 써야 할 때조차 억지로 참는다'면, 또는 '쓸 수 있으면서도 죄책감 때문에 못 쓴다'면, 이것 또한 자아이상의 영향이 크다. 그 사람은 외부의 도덕적 규범이나 부모, 종교, 문화 속에서 주입된 '절제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외부적 이상에 억눌려 소비를 회피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그는 자기 욕구를 억압하면서 이상화된 기준(자아이상)에 맞추려는 내적 갈등 속에 있을 수 있다.


명품 소비와 이상적 자아의 오해


현대 사회에서 명품은 자주 이상적 자아의 상징처럼 소비된다. 더 나아 보이고 싶고, 더 성공해 보이고 싶은 욕망은 쉽게 명품 소비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연결에는 함정이 있다. 명품을 갖는 것이 자아이상을 실현해 준다는 환상은 사람을 반복적인 소비에 빠지게 만들며, 그 안에서 진짜 자아는 점점 흐릿해진다.


물론 명품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는 있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품위를 증명해 주는 유일한 수단처럼 여겨질 때 발생한다. 자아를 바깥으로부터 끌어와 구성하려 할수록, 사람은 더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외부의 조건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명품을 단지 삶의 일부, 혹은 자신의 취향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명품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명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지, 명품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만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명품은 자아이상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성립된 자아의 일부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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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자아는 소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상적 자아는 결코 물질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 이상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형성된다. 자기를 성찰할 줄 알고,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삶의 본질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아이상을 실현해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소비에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왜 그 물건을 선택하는지, 그것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론: 이상적 자아, 삶의 중심으로 돌아가기


오늘날 명품과 패션, 유행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돼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 메시지에 응답하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 모습을 위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상적 자아는 내 삶의 방향이지, 내 소비의 총합이 아니다. 패션과 명품은 그 방향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품위는 절제된 소비와 삶의 진실함 속에서 빛난다.


자아 이상은 바깥에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빚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성해 가는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선택들—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낼지—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나’에 가까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 내 소비는, 내 삶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가?

내가 입는 옷, 사용하는 물건, 살아가는 태도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하게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유행과 명품의 흐름 속에서도 자기만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상적 자아는 소비를 따라 만들어지는 허상이 아니라,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인격이다. 그것은 조용한 존엄 속에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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