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프로이트, 절반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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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여성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되기 시작한 것이 불과 130년 전이었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가능했다. 프로이트가 남성의 성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눈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이전의 서양 학술사에서 단 한 번도 남자와 여자를 뚜렷하게 구분한 적이 없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아동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면, 서양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의 정착도 겨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물론 이탈리아에는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피렌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메디치 가문,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의 왕실과 연결고리를 가진 합스부르크가 등이 있었지만, 왕족이나 귀족사회에서나 가문의 유지가 가능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족보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기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족보는 가족뿐 아니라 가문의 개념이 오래전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조선에는 일찍이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는 아동 교육제도가 현존하여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서양 여자들에게 모성성이 부재하여 자녀에 대한 양육의 개념조차 없어 오랜 기간 유모 제도를 만들어 아이들을 유모가 키우는 것으로 되었다. [아동의 탄생]을 보면, 서구에서 ‘아동’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도 겨우 18세기였다. 몽테스키외의 [수상록]에서도 아동은 애완동물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프로이트조차도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성기를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로 불렀을 뿐, 여자는 여자의 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남자의 성기를 가지지 못한, 결핍이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남자에 불과했다. 이처럼 여자의 성을 남자의 성과 대비되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남자가 있으면 그 상대적 존재로서 여자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의 시도는 ‘남자는 누구인가’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지만, ‘여자가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데에는 실패하여 ‘절반의 실패’이다. 그런데 여자는 아직도 비밀에 싸여 있다. 아무도 여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모를 뿐 아니라, 한 이불 덮고 자는 자기 아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자도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여자는 누구인가?’이다. 이 수수께끼를 아무도 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여자가 누구인가를 아는 만큼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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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외수가 쓴 책 중[여자도 여자를 모른다]가 있다. 여자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잘 모른다. 여자는 자신의 여성성을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자가 자신의 여성성을 평생 제대로 사용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남자가 아니면 여자인 거지, 여자라는 걸 아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여자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를 억압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자가 여자를 몰랐기 때문이고, 여자도 ‘여자가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외수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여자,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난해한 생명체다.

24G!(x30)+78ft(3/1M)=∫6淫12CN∞뤽³

이건 무슨 외계 문자가 아니라 여자를 나타내는 공식이다.


여자가 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여자는 천지창조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외수는 수십 페이지의 방정식을 풀면서 블랙홀을 발견한 스티븐 호킹이라 하더라도 여자를 공식화하지는 못한다는 데서 은하계에서 가장 난해한 생명체라는 데에 동의했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의 절반의 실패는 당연하다. 프로이트는 ‘여자가 남근이 없는 남자’로 태어나서 어떻게 여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엄마와 동일시했지만, 엄마의 모성성과 동일시했을 뿐이다. 그래서 여자는 모성성을 여성성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모성성은 여성성보다는 오히려 남성성과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즉 모성성으로 산다는 것은 남자로 사는 것과 같다. 여자가 여성성을 억압하는 ‘히스테리’도 여자의 몸이 남성화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이나 프로이트의 절반의 실패도 이해가 간다. 그러한 실패는 오늘날 여성 각자의 삶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니까. 여성 한 개인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실패한다는 말이다. 내가 여자라고 해서 여자를 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로이트의 절반의 실패는 니체에 의해 어느 정도 회복된다. 프로이트가 여자 알기를 실패한 것은 남자를 기준으로 봤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런 관점을 뒤집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의 서문 첫 문장이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이다. 니체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전복시켰다. 그리하여 니체는 여자를 가장 잘 이해한 근대 철학자가 되었다.

여성 각자의 자기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 프로이트처럼 남자를 기준으로 삼는 한,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전복시킴으로써, 가부장적 질서와 권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가 여자다’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다. 그때가 바로 여성의 중년기에서 갱년기로 이어지는 기간이다. 그렇다고 그런 때에 이른다고 해서 여자가 모두 자기 자각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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