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문제, 여자의 문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보면, 잔느는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어 아름다운 저택에서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갖는다. 달콤한 사랑을 꿈꿔 오던 잔느에게 귀족 청년 줄리앙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사랑이 고파 결혼하였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온 순간부터 줄리앙은 돌변하여 여성 편력을 화려하게 펼쳐가기 시작한다. 연애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줄리앙에 충격을 받은 잔느는 방을 따로 쓴다. 그 사이 쥴리앙은 하녀와 바람을 피우고, 이웃집 백작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 외 다른 여자와의 외도로 성욕 채우기에 바쁜 쥴리앙은 백작부인의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잔느 곁에는 마지막 희망인 아들만 남았지만,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아들마저 바람둥이로 전락한다.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아들은 창녀와 도박에 빠져, 진 빚 때문에 결국 살고 있던 저택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잔느 곁에는 엄마가 누군지 모를 아들의 딸이 남게 된다. 마음도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어린 손녀를 키우며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딸을 마비시키는 엄마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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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의 불행한 일생을 서술하면서, 모파상은 그 소설에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제목 안에 모파상이 당시 프랑스 여자, 그리고 ‘여자’라는 존재의 삶이란 보편적으로 이렇다는 자기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모파상은 ‘프랑스 여자의 일생’이 아닌, ‘여자의 일생’이라 정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에서의 여자나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파상은 여자란 보편적으로 이렇게 불행하다는 결론으로 굳히기를 하는 것 같다. 여자가 보편적으로 겪는 불행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나는 이 책을 통해 여자의 불행의 출발점은 히스테리에 있다는 전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자에게 히스테리는 왜 발생하는가? 히스테리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엄마라는 존재에 초점이 맞춰진다. 남아선호 사상이 있는 유교 사회에 온몸을 담그고 살아온 엄마나, 약간 발이라도 담근 엄마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들을 바라보는 눈과 딸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행여 다섯 명 딸을 낳고, 아들이기를 기다리던 엄마가 여섯 번째 딸을 낳았을 때, 그 딸을 바라보는 엄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메두사의 눈을 장착할 수 있다. 엄마의 메두사 같은 시선을 받은 여섯 갓 태어난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돌 같이 굳은 수치심으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어떤 엄마든 ‘나는 여자다’라는 수치심을 시선에 담아 딸의 눈에 전달한다. 딸은 아무 지은 죄도 없이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살아가며, 그것들은 몸으로 스며든다. 그리하여 성적 수치심과 성적 죄책감이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 이러한 수치의 순간에 대해 메리 에이어스(Mary Ayers)의 저서 [수치 어린 눈]에서 “자신에게 결함이 있고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실존적 감정에 영구히 압도당한다”(26쪽)고 말한다. 이 표현 중 ‘실존적 감정이 압도당한다’는 말이 중요하다. 이 말은, 곧 ‘여성적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는 뜻이다.

엄마와 동일시된 딸은 이제 엄마의 시선에 포로가 되어 엄마의 모성성을 자신의 본성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이때 딸은 ‘여성적 감정’을 억압한 결과 여성성을 배제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얼마 동안?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엄마와 한 몸(동체성)이 되는 여자아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처럼 엄마에게서 태어났지만, 엄마나 나나 다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굳이 이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유경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서 모성성을 많이 차용한다. 엄마와 딸은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초중등 기간 동안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가 더 강해 보인다. 초등 남자아이 들 중에는 원래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더 세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여자아이는 엄마의 모성성을 차용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모성성을 일찍부터 사용한다. 이것은 딸이 최초의 엄마로부터 받는 시선과도 연결된다. 엄마의 시선을 받은 딸은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삶을 그대로 딥-러닝을 한다. 엄마가 딸을 한 번씩 바라볼 때마다 테라바이트급의 정보를 전달한다. 대체로 엄마도 여성성으로 살기보다는 모성성으로 살기 때문에 딸은 처음부터 여성성 대신 모성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자가 어릴 때부터 모성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성을 억압하게 되고 그 결과 몸은 히스테리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스테리화 된다는 것은 몸이 남성화된다는 말이다. 원래 여성의 모성성은 남성성과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처음부터 여성성이 배제된 채로 삶을 영위해 가는 법을 터득해 간다.

백설 공주의 계모 왕비는 거울을 통해 백설 공주를 통제한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동화 속의 계모는 그냥 계모가 아니라, 엄마의 나쁜 측면이다. 동화 속에서 엄마는 대체로 딸과 경쟁한다. 이런 엄마는 딸을 ‘사랑한다’면서 손안에 넣고 산산조각 낸다.

딸이 엄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쓴다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칼 융은 이런 과정에서 딸은 엄마와 동체성(한 몸)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백설공주처럼 딸은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 몸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서 말하고자 하는 여자의 불행은 바로 엄마와의 동체성에서 비롯된다. 딸이 아무리 공부 잘하고 똑똑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엄마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한다. 딸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엄마가 선택해 주기를 기다린다거나, 딸 자신을 위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엄마를 위해 판단한다. 어떤 때는 딸 대신 엄마가 판단하고 결정한다. 시험 일정이 가까워지면, 딸이 몸이 안 좋아도 딸 대신 엄마가 대신 아파준다. 어떤 바이올린 수험생은 대학입시 실기시험을 치는 바로 그 시각에, 집에 있는 엄마가 딸 대신 몸을 떤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모성성으로 결합한 후 동체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에 대한 엄마의 욕망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딸은 엄마의 욕망에 대해 ‘수동적’이 되면서, 모든 면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관계가 있다.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 가장 증오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 동시에 엄마와의 동일시가 일어난다.([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307)


남자의 정서적 상태, 영원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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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여자가 ‘엄마와의 동체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면, 남자는 ‘영원한 소년’의 문제를 안고 산다. 여기에는 좀 복잡한 상황 설명이 필요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아들은 3~6세 사이에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3세 이전에 아들은 엄마와 동일시하여 엄마만 바라보면 되었지만, 3세가 되어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엄마와 밀착된 관계를 끊는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남자아이는 마마보이가 되기 쉽다. 아들은 아버지를 없애 버리고 싶다. 엄마와 단둘이 있을 때는 좋았는데, 아빠가 개입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아들은 엄마만 있고, 아빠만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환상을 가진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엄마는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엄마는 아빠의 말을 더 잘 듣는다. 더군다나 엄마는 나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가 엄마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뭘까를 고민한다. 면밀히 관찰한 결과, 아빠는 남자답고 권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도 아빠처럼 남자답고 권위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와의 동일시를 멈추고 아빠를 동일시한다.

아들은 이러한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측면 외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측면도 받아들여야 한다. 아들이 3세 때 아빠가 엄마와 아들 사이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금지를 명한다. ‘너도 이제 컸으니 더 이상 엄마 살 대지 마’ ‘너도 이제는 네 방 가서 자야지.’ ‘너도 불만 있으면 이제부터는 말로 해!’

아버지는 여러 정황에 끼어들어 아들에게 ‘No!’를 명령한다. 아들은 그러한 금지와 언어화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거세 불안을 가진다. 엄마나 누나의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거세된 흔적이 있어, 나도 중요한 것을 잘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에 사로잡힌다. 아들은 6살이 되면서, 거세 위협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며 급격하게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거세 불안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아들은 내면에 초자아(양심, 징벌, 도덕의 기능을 하는 심리기관)를 만들어낸다.

초자아를 만들어 낸 아들은 이 초자아를 가지고 사회적 존재로서 세상 속에서 사회성을 발휘하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갈 줄 알게 된다. 그는 한동안 엄마의 시선에만 맞춰 살다가 아빠가 개입해 들어오자 엄마 아빠 모두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복잡한 심리 상황에 빠진다. 다른 말로 하면,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이때 남자의 문제가 드러난다. 사회적 존재가 되기는 하였지만, 끔찍했던 거세 불안으로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정서 발달이 멈춘다. 칼 융은 남자의 이런 상태를 ‘영원한 소년’이라 불렀다. 남자는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어도 자라지 않는 ‘영원한 소년’이 내면에 들어 있다.

이 영원한 소년이 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회적 측면을 끊임없이 발달시킨다. 공부를 잘해 좋은 성적을 내고, 명문대를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등이 다 내면에 있는 ‘영원한 소년’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돈을 많이 버는 데에 집착하는 부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의 내면에는 ‘영원한 소년’이 버티고 있다.

칼 융의 제자 마리아 폰 프란츠(Maria von Frantz)는 영원한 소년의 특징으로 ‘땅에 닿지 않는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녀는 그런 관점에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와 그의 저서 [어린 왕자]를 분석했다. 저자는 비행기 조종사이고 어린 왕자는 저 하늘 먼 별에서 왔다. 그녀는 비행조종사 외에도 높은 학문을 한 사람, 사상적 체계를 만든 사람, 정치인 등도 ‘땅에 닿지 않은 사람’의 부류에 속한다고 보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인은 대부분 ‘영원한 소년’이다. 정치인은 4년 만에 딱 한 번 땅에 닿는 순간을 만난다. 바로 선거를 하는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땅에 발만 닿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닿는다. 그러다가 선거가 끝나자, 한없이 높아져서 땅에서 멀어져 공중에 붕 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한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인이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영원한 소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마와의 동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여자와 영원한 소년인 남자가 만나 결혼한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결혼의 형태다. 문제 있는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면서 각자 복잡한 드라마를 엮어가면서, 그리고 상호 엮여 들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가정마다 문제가 없는 집이 없고,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가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다 가지고 산다. 그중 좀 탁월한 사람은 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나름 우월감을 만든다. 우월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깊은 열등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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