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을 일으키는 중년여성

반대로 기우는 중년기 운동장

여자는 남자보다 9배 리비도(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산다.

그 9배 리비도는 어릴 때부터 억압된다.

이렇게 억압하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남자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여자가 가진 에너지를 남자와 똑같이 경쟁하며 산다고 하면,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여자는 일단 자신의 리비도를 감추기 위해 자기 몸을 히스테리화 시킨다.

엄마의 시선으로 딸을 얼어붙게 만드는 모양으로 여자가 몸을 히스테리 화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큰 에너지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일단 억압했다가 어느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심연에 잠재하던 에너지를 끌어서 써야 하는 당위성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남자는 ‘아버지의 딸’을 감당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딸’은 많은 여자 중 꼭 한 명씩은 있다.

여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아버지의 딸’이 가진 에너지 정도가 아니다.

‘아버지의 딸’은 여자가 혼자서 꺼내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딸’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길어야 40대 중반까지가 유효기간이다.

그러나 9배의 리비도는 혼자서는 절대 끄집어낼 수 없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여자가 이 억압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할 시점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못하면 여자는 몸으로 신호를 보낸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픈 것으로 나타난다.



여자는 잘 아픈 또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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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잘 아픈 이유 중에는 히스테리의 증상으로서 오는 것도 있다.

왜 여자가 유독 남자보다 더 잘 아픈가?

그것은 여자가 히스테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남성적으로 사느라 여성성을 발휘하면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여자가 여성적 본성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잘 아프다는 것은 이제 히스테리를 벗고 여자답게, 여성성을 발휘하면서, 가장 ‘나답게 살라’는 신호이다.

여자의 몸이 아픈 것은 자신에게 그렇게 경고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집 안팎의 대소사에 다 신경 쓰느라 늘 긴장해 있다가 어쩌다 휴가라도 가서 편히 쉬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집을 떠난다.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아플 시간조차 없이 바빠 효과적으로 잘 눌러 놓았던 증상들이 한 번에 몰려오면서 간만의 휴가도 망치고 만다.

그런데 그것은 휴가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의 쉼을 위한 기회를 얻은 것이다. 휴가의 형태가 좀 달라졌을 뿐이다.

여자는 모성적 수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편의 말을 다 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이해를 하다 보니, 자기감정을 계속 억압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여자는 자신의 고유한 삶의 형태를 버리고 남편이 원하는 존재 형태, 자녀에게 맞추는 삶의 형태를 만들어내어 그것에 맞춰 산다.

여자는 대체로 이렇게 중년기를 맞이한다.

그러다가 중년기에 깊이 진입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입장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권력 구조도 바뀐다.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운동장이 반대쪽으로 기운다.

그때부터 아내는 그동안 억울했던 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오고, 상처받은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면서 여자의 신체는 불이 나고, 피부가 발개졌다가 나중에는 시커멓게 변하기도 한다.

갱년기 여성은 몸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잠도 잘 못 잔다.

그동안 참았던 화가 한 번에 올라와 온몸을 데운 결과 하얗던 얼굴이 어느새 새까맣게 변하기도 한다.

중년기 여자에게 이 정도의 증상이 나타나면,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존재 형태를 바꿔야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형태가 익숙해져 있어 바꾸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삶의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여자의 몸에서는 큰 반란이 일어난다.

그동안은 온몸이 여기저기 쑤시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질병으로 나타난다.

제일 먼저 염두에 둬야 하는 병이, 화병이다.

화병은 DSM-IV에서도 ‘중년기 한국 여성에게만 있는 병’으로 유명하다.

그다음에는 자궁경부암, 유방암 등 여성과 관련된 병에 취약해진다.

그동안 여자로서 자신의 감정을 많이 억압하고 살았다면 갑상선 암에 취약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 형태를 찾지 못한 결과 가장 많이 찾아오는 병으로는 우울증이 있다.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자에게 찾아오는 모든 병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경고이자 자신의 자기(self)가 보내는 신호다.

무슨 경고에 무슨 신호? 존재 형태를 바꾸라는 뜻의 경고이자, ‘나답게 살라’는 신호다.

‘나답게 살라’는 것은, 더 이상 모성성으로 살지 말고, 여성성을 발현하며 살라는 것이다.

여자, nothing으로 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아내는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남편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밤마다 아내를 두들겨 패고 가구를 부숴대도 그런 남편을 아내는 무시하지 못한다.

남편이 경제력이 없어 무능력하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조차 없어도 아내는 이런 남편마저 무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남편 뒤에는 거대한 아버지, 가부장적 사회, 아버지 중심의 상징적 세계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의 그런 폭력과 폭언과 같은 인격 모독을 당하며 존재감 없이 살아도 , 그것을 잘 견뎌내는 아내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응원과 칭찬을 받는다.

바로 가부장적 사회가 그런 아내를 칭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내면이 썩어 들어간다.

그런 칭찬과 찬사에 노출되어 그것을 즐기는 여자는 자신의 내면 상황을 외면하게 된다.

모성성만 사용하며 사는 여자, 남자가 원하는 모양으로만 살아가는 여자.

이런 여자의 존재감은 한마디로 nothing이다.

nothing은 자기 자리가 없고, 일정한 위치가 없고,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유교적인 사회와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살아왔다.

가문의 족보를 보라 어느 가문이 족보에 여성의 이름을 올리나?

유교사회에서 여자가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도 nothing이다.

한국동란 이후 반세기 동안 이룩한 경제발전 하에서도 여자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쟈신을 nothing의 위치에서 자기를 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중년기를 지나가면서 달라지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건강한 여성은 중년기를 지나면서 반전을 일으키고 만다.

100세 시대가 다가오면서 여성은 더 이상 과거처럼 살 수는 없다.

남편들도 앞으로 아내를 동등한 파트너로 세워야 자신의 100세의 삶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nothing이 all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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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이 아무리 nothing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냥 ‘무’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

nothing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순간, 즉 nothing이 all 이 되는 때가 찾아온다.

nothing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림 조각 맞추기, 또는 숫자 맞추기 퍼즐 게임기가 있다.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으로 된 게임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16칸 중 15칸의 조각 위에 그림이나 숫자가 있고, 한 칸이 비어있다.

그림을 맞추기 위해 이동할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다.

이 비어있는 곳이 바로 nothing이다.

이 공간은 매우 순종적이어서 그림을 맞추기 위해서는 게임자의 의도에 의해 여기저기 이동할 수밖에 없다. 아무런 권력도, 위치도, 의미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빈 공간은 텅 비어있는 nothing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미가 달라진다.

바로 이 공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사실이 자각되는 순간이 온다.

그림을 맞추고자 하는 목적은 이 공간이 있어야 실행될 수 있다.

그래서 nothing은 곧 all이 된다.

여자의 존재가 바로 이러하다.

아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다가, 아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순간이 온다.

모든 것이 nothing이었던 아내의 의도에 의해 모든 것(all)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결혼의 과제,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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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를 지나는 아내와 함께 사는 남편은 아내가 질병의 부름을 받기 전에 아내의 변덕스러운 감정 앞에 먼저 서야 한다.

감정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 오래 덮어두면 몸에 독이 된다고 노스럽은 경고한다.

부부 관계에서 누적된 감정이기 때문에 오직 남편만이 그 감정을 해결해 줄 수 있다.

남편이 아내의 쌓인 감정을 해결해 주면, 자기가 아내에게 준 상처를 되돌려 받게 되면서 남편은 내면의 성숙을 경험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준 상처를 되돌려 받는다는 것은 말이 쉽지, 당사자로서는 언제라도 외면하고 싶고 당장 도망가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일이다.

남자는 이런 과정이 아니면 철들 수 없다.

어떤 남자는 고상해지기 위해 학문을 연마한다.

철학, 역사, 신학, 문학, 양자물리학 등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고급스러운 훈계할만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해서 그 남자가 철이 드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 능력이나 지식은 높아질 수 있으나 그런 능력을 얻었다 해서 그 사람을 성숙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지식은 what(무엇)의 영역에 속한다.

그가 그런 지식으로 나의 사회적 면모가 빛날 수는 있으나, 그는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를 모른다.

나의 who(누구) 임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우자가 필요하다.

남자는 여자를 통하지 않고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없다.

여자라고 다 가능한 것도 아니다.

동거녀도 불가능하다.

오직 결혼으로 맺어진 아내만이 가능하다.

물론 아내가 있는 남편이라고 해서 모두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직장인으로서 나, 어떤 직책을 가진 나, 어떤 지식체계를 가진 나, 어느 정도 경제력의 뒷받침을 받는 나,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나, 이런 나의 모습이 대단해 보여도 모두 나의 ‘what’에 관한 것에 불과하다.

오직 아내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죽마고우 앞에 서는 나는 다른 친구들 앞에서의 나와 분명 다르다.

직장 동료 앞에서의 나는 가족 앞에서의 나와 분명히 다르다.

사회적 지위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새롭게 발견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관계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나 자신의 객관적 인식을 강화해 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발견한다.

그러나 아내 앞에서 나는 ‘영원한 실패자’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배우자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nothing과도 같았던 아내가 중년기를 넘어서면서 all이 되어가고, 이제 오랫동안 all이었다가 지금의 나는 갈수록 nothing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것이 남자가 철들어가는 방식이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nothing으로 살아온 아내는 나를 그냥 nothing으로 살기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내는 이미 자신 안에 all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가 nothing으로 머물며 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자주 아내 앞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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