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존재: 태아의 기억과 인간의 탄생
태아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부모의 부부관계, 세상의 이치, 존재의 의미까지. 다만 성인의 언어와 인식 능력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 태아는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반응한다. 이 전지전능한 상태는 감각의 발달과 함께 점차 제한되며, 몸의 경계를 인식하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어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프랑수아즈 돌토의 정신분석학은 이 신비로운 존재의 구조를 해석하는 데 탁월한 통찰을 제공하며, 천문학은 그 존재의 기원을 우주적 차원에서 설명한다.
천문학자들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탄소, 산소, 수소, 질소, 인 등—가 태초의 별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의 나이는 137억 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이며, 태아는 그 신성한 물질을 그대로 가지고 이 땅에 도착한다. 이 우주적 기원은 태아가 단순한 생물학적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주의 오랜 기억을 품은 존재'임을 의미한다.
태아는 하늘에서 왔다. 그는 별의 언어를 알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을 기억한다. 이 전지전능성은 감각과 언어 이전의 직관적 인식으로 작동하며, 태아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구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신성한 존재는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지구 코드’에 맞춰 제한되기 시작한다. 감각의 발달은 존재의 현실화이며, 동시에 우주적 기억의 제한이다.
돌토는 태아를 ‘완전한 인격체’로 보며, 수정되는 순간부터 외부 세계를 인지한다고 말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감정, 아버지의 말, 세상의 소리, 심지어 부모의 갈등까지도 감지하고 기억한다. 그는 언어 이전의 언어, 감각 이전의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며, 존재의 근원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출생과 함께 태아는 '심리적 탯줄 거세'("네가 내 아들 또는 딸로 태어난 것을 환영한다"라고 선언함)를 경험한다. 이는 존재의 환영과 동시에, 감각적 제한의 시작이다. 그로 인해 남자는 남자로 살기 시작하고, 여자는 여자로 살기 시작한다.
만일 아들을 기다렸다고 딸을 낳아, 부모가 그 서운함을 "네가 아들인 줄 알았는데, 딸이라 서운하네"라고 표현하면, 이 딸은 자신과 다른 성에 대해 거세하지 못하고 성적 개념이 여성과 남성을 넘나들면서 일평생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최초의 언어적 시니피앙으로 인식하며, 그 리듬을 통해 인간관계의 증거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출생 이후에는 이 리듬이 사라지고, 외부 세계의 언어와 구조에 적응해야 한다. 이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제한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우주의 오래된 기억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의 품을 경험하면서 더 이상 ‘우주 코드’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점차 ‘지구 코드’에 맞춰 살아가는 제한된 존재로 자리 잡는다.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감각이 발달하고, 피부의 경계를 인식하면서, 태초의 전지전능함은 점차 축소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지닌 잠재력의 단지 4~5%만을 발휘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제한이야말로 역설적인 축복이다. 우리는 연예인처럼 피부의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좁은 자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집단의 투사를 받으며,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내면의 정신은 피부의 경계를 뚫고 나아가며, 지구적 코드에서 벗어나 다시금 우주적 코드로 급격히 전환된다. 이 순간, 자아는 감당할 수 없는 확장을 경험하며, 그것이 바로 공황장애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태아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태교의 중요성을 극대화한다. 태교는 단순한 음악 감상이나 음식 조절이 아니라, 부모의 정서적 안정과 관계적 책임을 포함하는 총체적 작업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머니의 정신적 고통은 태아에게 목숨을 뺏을 수도 있다”라고 했고, 돌토는 부모의 말과 감정이 태아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고 강조한다.
임신 중 커플은 아이를 중심 존재로 상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며, 분노를 풀어야 한다. 이는 태아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투입이자, 존재의 환영을 위한 준비다. 돌토는 출생 직후 “너는 엄마 아빠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을 환영한다”는 선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태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가 선택한 성과 삶의 의미를 확정 짓는 상징적 행위다.
태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언어화하지 못한다. 이 언어화되지 않은 경험은 태내에서조차 치명적인 상처로 남을 수 있다. 태밖에 있는 부모의 부부갈등에 노출되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때, 태아는 태밖의 상황을 지옥으로 인지할 수 있다. 나를 찾아온 내담자 중 심각한 정신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 그 어머니에게 확인해 보면 출산예정일이 지났음에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아 오래 지연되거나 제왕절개로 태어난 경우가 많다.
또는 부모가 아이를 우연적 존재로 취급하거나,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길 때, 아이는 삶의 목표를 잃고, 자기 동일성이 흔들리게 된다.
돌토는 이러한 상처가 출생 이후에도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갓난아기의 식욕 상실, 내장 장애, 토하기, 불안 등은 모두 ‘몸의 언어’이며, 언어화되지 않은 고통의 표현이다. 아이는 부모의 문제를 떠안고, 희생적 치료사로서 증상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상징적 시련의 대물림이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수많은 주름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는 일생 동안 필요한 능력과 재능을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다. 아이는 이 주름을 하나씩 펼쳐가며, 현실화 능력을 키우고, 성숙한 인생을 살아간다. 태아는 전지전능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감각의 제한을 통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알 필요는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어가는 과정이 곧 인간화이며, 존재의 현실화다. 태아는 존재의 근원을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을 감각과 무의식으로 표현한다. 태교는 이 존재를 환영하고, 언어화하며, 관계적 책임을 다하는 작업이다. 이는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존재의 탄생을 준비하는 철학적 행위이며, '별에서 온 존재가 지구에 맞춰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율'이다.
피부라는 경계를 지닌 하나의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태초의 전지전능함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면 깊은 곳에서 '존재의 상승 욕구'로 전환되어 작용한다. 이 갈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전지전능함에서 몸의 한계로 제한되는 경험이야말로, 삶 전체를 통해 성장을 도모하고, 잠재된 재능을 발견하며,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