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Self)가 태어나기 전, 반드시 치러야 할 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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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심각한 표정, 과도한 감수성, 세상을 다 아는 듯한 말투.
어른들의 눈에는 그것이 유난스럽고 피곤해 보인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자리에서, 그리고 상담실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을 떠올려 보면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된다.
중2병은 병이 아니라, 자기(Self)가 태어나기 직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산고라는 사실을.
아이는 오랫동안 부모의 기대 속에서 자란다.
착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가짜 자기(False Self)’**를 만들어낸다.
살아남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식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시작되면 이 가짜 자기는 더 이상 아이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반항한다.
부모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세상을 비웃고, 때로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부모라는 거울을 깨뜨려야만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투쟁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하나의 ‘심리적 부친살해’다.
부모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시선으로만 규정되던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사춘기 아이들이 종종 보이는 과도한 자신감, 혹은 고독한 영웅주의.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나는 특별해.”
이 말들은 오만함이 아니라 방어에 가깝다.
아직 단단하지 않은 자아(Ego)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임시적인 갑옷이다.
전능감의 환상은, 사실은 너무 쉽게 상처받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이 시기를 무조건 꺾어버리려 할수록, 아이는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
위니캇은 인간에게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중간 영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놀이나 예술, 상상력이 바로 그 공간이다.
그런데 사춘기에는 이 중간 영역이 급격히 흔들린다.
그래서 아이의 감정과 관계는 종종 극단으로 치닫는다.
사랑과 증오, 존경과 경멸이 빠르게 뒤바뀐다.
이때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공격성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보복하지 않고, 버텨주는 것(Holding)'이다.
아이 스스로 “내가 이렇게 화를 내도,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는구나”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 경험이 쌓일 때, 아이는 비로소 타인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을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엮어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사춘기는 그 이야기의 저자가 부모에서 자신으로 넘어오는 시점이다.
문제는, 아직 글쓰기에 서툴다는 데 있다.
그래서 과장된 설정이 등장하고, 감정은 과잉되고, 말은 때로 유치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연습이다.
아이들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해석한다.
친구, 연예인, 가상의 캐릭터에 자신을 겹쳐 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임시적인 답을 써 내려간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중2병은 분명 광야의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났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한 그 시간.
정체성은 흔들리고, 불평은 늘어나고, 방향 감각은 사라진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난다.
사춘기의 방황 역시 마찬가지다.
영혼이 성숙해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분석가이자 어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아이를 고치려 들지 않는 것.
Ego를 억지로 강화하지 않는 것.
대신, 그 밑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는 빛나는 Self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중2병은 병(Disease)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자기(Self) 탄생을 위한 고통스럽고도 거룩한 축제’다.
어른이 된 우리는 그 축제를 이미 통과해 왔다.
다만, 그 의미를 잊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