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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Dec 26. 2018

버르장머리 없음과 '아무 말 대잔치'

토론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태들

행사장 겉모습부터 이게 뭔가 싶었다. 건물 이름도 무슨 회관이었는데, 장내에 들어서니 탁자마다 하얀 식탁보가 깔린 결혼식장 같은 분위기의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앞에는 "두발 제한과 청소년 인권"이라는 현수막이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주최는 국가청소년위원회. 이 이름에서부터 이 이야기의 시대 배경을 눈치챈 독자도 있을 것이다. 국가청소년위원회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정부 조직이다. 2006년 무렵, '대한민국 청소년 헤어스타일 쇼'와 두발 제한 관련 토론회가 함께 열리던 어느 행사장 풍경이다.


그때는 한창 두발 자유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거리 집회, 서명 운동, 학내 행동 등이 이어진 직후였다. 국가청소년위원회가 토론회를 열 법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행사 기획안을 몇 번이나 읽어 봐도 도무지 두발 자유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해서 정책으로 추진하려는 정부 기관으로서의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채 1시간도 되지 않는 토론회 시간부터 그랬고, '헤어스타일 쇼'를 열고 청소년의 꿈과 좌절과 희망을 표현하며 "청소년 헤어스타일의 객관적이고 타당한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1부 기획에서는 유머 감각마저 느껴졌다.


그 자리에 토론자로 섭외되어 참석했던 나는 사실 속으로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청소년운동을 시작한 지 고작 1년 반 정도 되었던가? 정부 기관에서 연 이런 느낌의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나름의 다짐을 곱씹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서로 잘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로 흘러갈 공산이 커 보이는 토론회에서,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각' 세우는 발언을 하기로 단체에서 얘기하고 왔다. 지금이야 뭐 그런 일에도 무덤덤하지만, 당시의 나는 행사 이후에 결국 체하고 말았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 서는 일에 긴장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짓을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국가인권위원회 결정 등을 소개하며 두발 자유가 적정한 선에서 타협할 문제가 아닌 당연한 인권이고 이를 제한하려고 하는 학교 측에서 제한이 불가피함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런 불가피한 이유가 증명된 바는 없다고, 그러니까 두발 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앞으로는 왜 불가피하게 인권을 제한해야만 하는지 그 근거를 주장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근거가 없다면 당연히 두발 자유가 보장되도록 정부에서 조치할 의무가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이게 뭐 대단한 소리라고 그렇게 긴장을 했나 싶겠지만 그 시절, 그날의 토론회 분위기 속에서는 그것도 꽤 급진적이고 '조화롭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만큼이나 강단 있는 패널이 그날 1명 더 있었다. 자유교원조합이라는 단체에서 나온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 교사는 내 발표가 끝나자 무언가 자극을 받았는지, 이미 자기 발표는 다 끝났음에도 마이크를 잡고 사회자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10초만 발언하겠다"라며 바로 말을 시작했다. 그러고서 그가 한 말이란, "학생들의 샤기 컷이나 꽁지 머리는 불결하고 혐오감을 준다", "머리 기르고 화장한 학생들 가방을 뒤져 보면 담배나 나오지 않느냐"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두발 자유는 "방종"이라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근거도 뭐도 없이 청소년과 머리카락에 대한 편견과 자신의 혐오감만 표현하는 그 모습은, 바로 직전 근거를 좀 대라고 요청한 나의 말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 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이크를 들고 10초의 마무리 멘트를 남겼다. "10초만 하신다더니 1분 50초 정도 발언하셨고요, 그러니까 인권교육을 좀 받으시면 좋겠네요."


그렇게 토론회가 끝나고 주최 측이 밥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나는 다른 인권 활동가의 이름을 대면서 "제가 존경하는 OOO 씨 말로는 깽판을 친 행사에서는 밥을 먹는 게 아니라더군요."라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훗, 이 정도면 쿨하고 까칠했겠지?' 같은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 아주, 아주 조금 했다. 그렇게 질러 놓고 그 교사 등과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도 좀 힘 빠지는 모양새였을 테니, 맛있어 보이는 연어 스테이크도 안 먹고 나왔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토론회 뒤 연어 스테이크를 서빙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봤고 아마 이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때 내가 괜히 이름까지 댔던 그 활동가한테는 좀 미안하다. 나도 좀 민망해서 그랬으니 용서해 주길. 그날 행사에 참가했던 정부 참여 기구의 한 청소년분이 나에게 "참 버르장머리가 없으시네요"라고 평한 것은 유쾌 씁쓸한 뒷이야기다.



'아무 말'의 해악


나는 여전히 버르장머리가 없고, 토론회에서 몇 마디 쏘아붙이고 아무렇지 않을 정도까지는 무뎌졌다. 그때고 지금이고 학생 인권 관련 토론 따위를 하면 그냥 자기 편견만을 쏟아 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아니, 요즘에는 더 진화해서 토론 주제 자체를 벗어나서 이야기해 대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2014년 1월, 문용린 서울시 교육감이 서울학생인권조례를 후퇴시키려는 의도로 공청회를 열었다. 그런데 그 공청회에서 한 교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느니 전교조가 적화 공작을 하려 한다느니 하는 내용을 길게 발언했다. 사회자가 참가자 중 교사인 분만 발언 신청을 해 달라고 한정했던 것마저 무시하고 늘어놓은 연설이었다.


2016년 6월 27일, 광주광역시의회에서 '광주 학생 인권 개선 방안 모색'이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한 발제자의 발제문은 학생 인권 개선 방안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았고, 빌헬름 라이히가 어쩌고 쥬디스 버틀러가 어쩌고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반 정도를 채웠고, 그 뒤에도 또 강원도교육청에서 낸 무슨 자료를 소개하면서 욕하는 게 나머지 반 이상이었다. 다른 발제자의 발제문은 어느 미국의 과학자가 소아성애자인지 아닌지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학생 인권을 잘 몰라서 할 말이 별로 없었다면 발제자로 안 나오는 게 좋았을 텐데. 또 한편 강원도와 충북에서는 학교인권조례와 교육공동체권리헌장이라는 것을 교육청에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보수 단체들이 와서는 조례·헌장 초안에 명시되지도 않은(이게 고의로 빠진 건 물론 문제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동성애 조장"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자신들이 반대한다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읽어 보기나 하는지도 좀 의심스럽다.


SNS에서 탄생한,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유행어가 있다. '아무 말', '아무 말 대잔치'이다. 어떻게 봐도 진지한 생각 끝에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던지는 것 같다는 의미다. 또는 주제와 맥락을 벗어나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무 말'을 할 자유가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모두 공신력 있는 공론의 장으로 초대받아서 자리를 차지할 이유는 없다. 누가 동의하는 주장인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주제와 맥락에 따라 이야기를 하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알며, 자료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상대이기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 '아무 말'을 제대로 거르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이크를 쥐여 주니까, 귀중한 공론장의 자원도 낭비되고 있다. '아무 말 대잔치'가 된 토론 자리에서는 공들여서 가치 있는 말을 하려는 이들이 되레 손해를 보는 셈이기도 하다. '아무 말'을 거르지 못하니, 최근 몇년 사이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부터 '아무 말'을 하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하긴, 정부 기관이 "객관적이고 타당한 청소년 헤어스타일의 대안" 같은 소리를 하면서 헤어 쇼와 토론회를 열던 것을 떠올려 보면 아무 말 대잔치의 조짐이야 진작부터 있긴 했다만. 


나는 이렇게 '아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토론에 참여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토론의 자리를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늘어놓고 심한 경우에는 토론 자체를 방해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는 의심을 갖고 있다. 2018년에는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공청회 자리 등에서 '아무 말'을 하던 사람들이 물리적 폭력까지 행사했으니, 이들이 논의 자체를 중단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의심은 더 굳어졌다. 성소수자 혐오를 일삼고 인권 관련 법제도 강화를 반대하고 다니는 이들이 특히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이며 공청회장, 토론회장 등에 출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이지, '미성숙'한 모습이다.


나는 그런 '아무 말'이야말로, 참가자들에 대한 심각한 무례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서른 살 정도 차이 나는 것 같은 교사에게 같은 위치의 토론자로서 인권교육 좀 받으면 좋겠다고 한 것과 그 교사가 발언권도 얻지 않고 마이크를 잡고 청소년들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 혐오감만을 쏟아 낸 것 중 과연 어느 게 더 '버르장머리 없는' 일이었을까? 2014년 1월의 그 서울시교육청 공청회에서, 한 인권활동가는 단상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는 이유로 예의가 없다고 야유를 받았다. 학생 인권과 별 상관이 없는 자신의 '뇌 내 망상'을 소재로 한 일장 연설로 토론의 시간과 기회를 빼앗은 사람과 단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사람 중에 누가 더 무례했을까? 그런 토론회나 공청회 등의 자리에서 ‘아무 말 대잔치’가 얼마나 큰 해악인지, 공론장에서 '아무 말'을 어떻게 필터링해야 하는지, 부디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좀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 2016년 〈워커스〉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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