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과 이름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활동을 하다 보면 왕왕, '좌파' 또는 '진보'로서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일이 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속에서는 좀 복잡한 반발심이 불거진다. 제일 먼저는 "저는 좌파가 아닌데요?" 하는 대답을 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 말도 또 정확한 것은 아니고 설명하기엔 복잡한지라 침묵을 택할 때가 더 많다. '네가 좌파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라며 일종의 농담이나 비뚤어진 고집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굉장히 좌파적으로 보이는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내가 좌파가 아니라니? 글쎄, 나는 나 자신이 좌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어떤 맥락에서는 좌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좌파'라는 개념을 둘러싼 여러 경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좌파라는 개념의 독립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개념이 사용되는 문맥과 효과이다. 최근에는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와 같은 질문도 곧잘 받게 되는데 이 질문에 답하는 일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ㄱ은 A이다."라는 말은,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겠지만, 나는 이런 진술 자체만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분류'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규정'의 의미이다.(기존에 학적으로 존재하던 개념 구분은 아니고, 내가 어감에 따라서 새로 붙여본 이름이다.)
분류는 여러 가지 현상이나 사물을 특정한 개념의 틀 속에서 배치시키는 일이다. 예를 들어 여러 이륜차들을 자전거와 스쿠터, 오토바이 등으로 분류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자전거다… 왜냐하면 바퀴가 두 개 달려 있고, 타는 사람의 다리 힘을 페달로 바퀴에 전달해서 움직이므로', '이것은 스쿠터다… 왜냐하면 바퀴가 두 개 달려 있고, 기름을 이용한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며, 변속 기어가 없고 배기량이 작으므로' 등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분류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특성을 관찰하고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규정은, 분류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서 당위와 규범을 부여하고, 개념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사례로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겠다. '이 사람은 의사이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할 줄 알아야 하고, 의료인으로서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저 사람은 목수다… 그러므로 손재주가 좋을 것이고 나무를 잘 다룰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말이다. 또, 예를 들어서 도로교통법을 따질 때라면 무언가가 자전거라고 말하는 것에는 규정의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규정하는 진술은, 그것이 정말로 그것다운지, 그것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논하는 것이다.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고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나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개념과도 연결될 것이다.
보다시피, 분류는 귀납적이고 규정은 연역적이다. 또한 분류가 인식적이라면 규정은 실천적이다. 물론 이 둘은 딱 잘라 나누어지지 않는다. 규정하기 위해서는 보통 분류가 선행되어야 하며, 분류는 그 자체로 규정의 효과를 가지곤 한다. 다만 맥락에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더 비중을 둔 이야기인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류의 방식으로 내가 '좌파'라고 말하는 데 이견이 없다. 나의 생각이나 정치적 성향, 활동은 좌파냐 우파냐 하는 개념 틀에서 일반적으로 좌파로 분류될 테니, 나는 좌파가 맞다. 그러나 나는 규정의 방식으로 나를 '좌파'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좌파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좌파에게 기대되는 규범이나 성질을 나한테 요구한다면, 나는 그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고, 내가 좌파답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거리낌을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가 아니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나는 내가 세상의 분류에서 페미니스트에 속할 가능성이 높음을 안다.(뭐, 여러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내가 페미니스트로 분류될 만한지 여부를 알려는 목적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이라면, 그렇다고 답해주는 것이 보다 정확한 소통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나에게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기대할 만한 어떤 생각이나 실천을 요구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면, 내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오해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다. 어쩌면 '분류'와 '규정'을 구분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주의자'나 '페미니스트'처럼 어떠한 사상이나 운동에 '~주의자', '~이스트(ist)'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말을 붙인 경우, 실제로 그 사상에 따라 살거나 또는 그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말을 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언어 체계에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에 동의하거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페미니즘/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꼭 전업 활동가여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상 운동에 함께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그런 호칭을 쓰는 것이 의미가 명료하다고 생각한다.
즉, 나에게 '~주의자'나 '~이스트(ist)'라는 개념은 그것만으로도 규정의 맥락이 더 강하고 무겁게 담겨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더더욱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즘 운동의 활동가가 될 생각도 없으니,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페미니스트로서의 규범이나 실천을 요구받을 뜻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활동가이고, 혹시나 나중에 이런 말이 만들어지고 보급될 수 있다면, '미성년주의자(minor-ist)'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간에서는, 페미니스트란 곧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며, 성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을 지지한다면 곧 페미니스트라는 식의 정의도 돌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한 주장이 등장한 맥락도 대략 이해하고 있다. 그런 분류와 규정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내가 그 말을 쓰는 의미와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차이점이 서로에게 공유되려면 여러 대화의 단계를 거쳐야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섣불리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거나 "나는 좌파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이 내가 의도하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좌파로 분류되는 데는 동의하지만 스스로 좌파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같은 말을 하자니, 아무래도 설명하기도 어렵고 피곤한 노릇이다.
특히나 페미니즘이나 좌파 같은 개념의 경우에는, "나는 아니다."라는 말이 곧 일종의 안티 선언이거나 회피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신중함의 미덕이라고 여긴다. 상대방과의 대화의 문맥 이상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맥락까지 고려해야만 하니,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스러운 일이다.
나는 언어뿐만 아니라 나의 이름, 나의 정체성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앞서서 나는 마치 나의 정체성이 오직 나의 결정에 의해 정해지고, 내가 규정한 내 정체성들 외에는 나에 대한 규정으로 받아들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듯이 글을 썼다. 그러나 이는 내 마음속의 이상일 뿐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자리를, 규범을 받았다. 실은, 나에게 "너는 좌파로서 이래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내가 속한 관계 속에서 나에게 '좌파'라는 이름과 그에 따른 규범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내가 그것을 거부하려고 애쓰더라도, 나는 어느 정도는 내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를 신경 쓰고 적당히 타협해가면서 살아갈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나 생활이란 것들이 소속감이나 관계성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음을 알기에. 그래서 "나는 좌파가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히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은 자신이 속한 단체나 운동이나, 좀 더 넓게는 진영(좌파이든 진보이든)의 이름이 곧 자신의 규정, 정체성이라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보통 주류 사회의 질서에 저항하고 변화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러한 운동 사회의 이름이나 정체성들은 더 가치 있게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 사회 안에서의 호명 역시 마찬가지로 기존의 구조와 질서 속에 들어가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칙적으로, 내가 (타인이 본 바로) A라고 분류된다는 것이, 곧 내가 (자신이 정한 바로) A여야 한다는 것이 될 수는 없다. 타인이 "당신은 좌파니까/인권운동가니까/진보적이니까/페미니스트니까 이러이러하겠지?"라고 말하는 것을 내가 따라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많은 활동가들이 스스로를 얽매는 당위나 규범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이 무엇으로 분류된다는 것과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분리하여 생각해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해본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과 이름 아닌 것을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