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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Feb 10. 2019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묻는다면

10대 때부터 청소년운동을 시작하여, 많은 활동을 기획하고 여러 일들에 참여해 왔고, 돌아보니 그새 '거부'를 두 개나 했다. 2011년 11월에는 수능·입시를 거부한 청소년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중퇴한 사람들과 같이 '대학입시거부 선언'을 발표했다. 그 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입영통지서가 나와 곧바로 병역거부까지 하게 됐다. 다른 활동가들이 지문날인도 거부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않았더라면 '거부 3관왕'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할 때는 그냥 웃고 만다. 활동가들은 참 거부, 불복종을 많이들 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활동가들은 종종 급진적인 사람, 성미 급한 사람, 세상을 너무 빨리 바꾸려고 무리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학입시거부 직후, 나도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느냐" 같은 말을 듣곤 했다. 너 혼자 희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 섞인 이야기도 들었고, 그렇게 급하게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는 훈계도 들었다. 고등학생 때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어쩌다 차를 얻어 탔던 친구 아버지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바꾸어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점진적으로, 절차에 따라서,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지, 그렇게 급하게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 아마 현직 고등학생이면서도 이런저런 운동에 전념하는 내가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열심히 주장하고 운동을 만들던 의제는 두발자유화, 학생회 법제화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급진적이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때 일기장에도 남겨 둔 말이지만, 나는 급진이냐 점진이냐를 자신이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느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온몸으로 부딪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다. 자신이 온힘을 다해 가장 빠르고 급격하게 세상을 바꾸려고 애써도, 세상이 코딱지만큼도 움직이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세상이 서서히 바뀌어야 하는지 빠르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공부해서 성공하고 나서 바꾸라?


특히 청소년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젊은 활동가들이 아무래도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운동 같은 걸 하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공하고 나서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나 역시 대학·병역 거부로 고졸에 전과자가 되기보다는 학벌도 좀 가지고 군대도 갔다 온 뒤 노력해서 힘있는 사람이 되어서 바꾸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교육 제도를 비판할 때면 돌아왔던, "열심히 공부해서 교육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돼서 바꿔라"라는 말의 다른 버전이라고나 할까.


물론 우리 모두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다 해도 교육부 장관이나 대통령 또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힘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말하며 출세의 길을 걸은 이들이 대개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많이 보아 오지 않았나. 기득권 세력이 돼서 뜻을 버렸거나, 좌절했거나. 일말의 변화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있었을지 몰라도, 그런 일 또한 결코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 열심히 공부해서 권력의 일부를 가진다고 해서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은, 우리 사회의 구조는 호락호락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꾸려가는 것이지, 몇몇 영웅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왕이나 영웅조차도 그들을 원하고 만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써낼 답안지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가 계속 통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정답을 원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겪어 온 입시교육 속에서 몸에 밴 대로, 답안지에 써내고 동그라미 받을 수 있는 정답, 다른 사람들이 큰 거부감 없이 인정하며, 내가 이렇게 하면 세상이 '짠' 바뀔 거라는 정답 말이다.


그래서 그런다고 세상은 안 바뀐다며 그건 정답이 아니라며 냉소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천을 평하고, 점진적인 게 좋은지 어떤지 따위를 논한다. 그런 논의를 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대개 '정답'을 판단하는 가치 체계와 기준이란 기존 사회의 보수적인 잣대가 되기 십상이다. '출세해서 바꾼다'는 비현실적인 방법, 하지만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에선 가장 정답스러운 방법을 추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처럼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딱 맞는 '정답'이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런 '정답'을 찾고 정답대로만 하고 싶어 하는 태도나 이데올로기를 '정답주의'라고 부른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답안지에 써낼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여러 사람의 행동이 쌓여서 움직이고, 나 하나가 뭘 한다고 해서 세상이 확 바뀌는 기적은 없다. 애초에 나 역시 내가 대학입시거부 선언에 참여하고 병역거부를 한다고 해서 그걸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단 말인가. 대부분의 거부/불복종 역시 정치적인 행동으로서 의견을 가시화하고 변화를 만들기 위한 운동의 일부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동을 할 뿐이다. 그건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의 답'이고 '우리의 답'인 것이다. 정답이 아니라 우리의 답을 통해 힘을 모아서 부대끼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동이다.


나는 정답은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나서 정답을 찾는 태도를 버리고, 동시대를 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해 나간다면, 세상은 조금 더 빨리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 《한겨레21》에 2012년 5월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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