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현 Jul 28. 2019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의 자세

운동의 결과와 의미를 마주하는 것에 대해


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은 자주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운동을 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이런 물음은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때로는 갓 운동을 접한 이의 목소리로, 때로는 활동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회의감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나?"라고 묻는다면 일단 대답은 긍정일 것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운동이 세상을 바꾸어 온 사례가 있으니까 말이다.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와는 별론으로, 일단 '가능'한 건 명백하다. 운동 말고도 다른 요소들도 세상을 바꾸어 왔기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겠으나, 운동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변화들도 많다는 점에서 운동의 의미나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냐는 의문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예를 들면, 너무나 거대해 보이는 세상의 모순과 잘못, 그에 비해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지는 운동의 현실과 활동가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감상이라든지, 지친 마음의 표현일 때가 잦은 것이다. 혹은 운동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정당화하는 것이거나.


어쨌건 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려는 운동,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고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운동, 소수자나 약자들의 운동은 험하고 어려운 일이 많다. 그리고 운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바꾸지 못하고 실패할 때가 더 많다. 우리가 요구한 변화는 작은 것조차도 10년, 20년 이상이 걸리곤 한다. 운동은 세상을 바꿀지 몰라도 활동가가 그 변화를 충분히 체감하고 목도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므로 "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러한 질문을 마주한 활동가들의 태도나 자세를 가다듬고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활동가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자신이 하는 운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운동의 결과에 대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우리가 바뀌지 않기 위해서?


영화 〈도가니〉에는 이런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또는 원작 소설에는 비슷하게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라는 말도 나온다.)


운동을 하는 이유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영합하고 잘못을 묵인하거나 잘못에 동조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것을 바꾸는 일보다, 나의 신념과 도덕성을 지켜 내는 것은 더 쉽고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다가 이 대사를 듣자마자 "자기 만족적인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해로운 주장이라고 여긴다.


운동은 도덕적인 일,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수양을 하거나 자선 사업을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어떤 형태로든 세상으로 뛰어들어 타자를 만나고 설득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만일 운동이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활동가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체성을 지키는 그러한 종류의 만족을 우선해서 운영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운동의 사유화는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과연 효과적일까?


이러한 사고방식이 혹시라도 활동가들의 마음을 지탱해 주는 기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활동가가 너무나 지쳐서 회의감을 품고 운동을 그만두느니, 차라리 활동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 만족적 운동을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임시 방편으로 자기 자신에 주목함으로써 힘든 상황을 버텨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이 바뀌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방어적인 태도에서 멈춰 버리면, 운동에 대한 의지나 전망도 작아질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운동을 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나?"라는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된 활동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운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바꿀 수 있습니다."

 

활동가에게 필요한 모순


그렇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 거창하고 와닿지 않고, 활동가 개인이 감당해낼 짐은 너무나 크다. 운동 중에는 승리보다는 패배의 순간이 더 많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거나 버텨낼 것인지는 정답이 없는 일이고, 활동가마다 삶의 자세도 운동에 대한 태도도 다를 수 있다. 말로 이러쿵 저러쿵 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있다.


①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


우선, 결과에 너무 연연하거나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섣부르게 가시적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조급함은 운동을 망가뜨릴 위험이 있고, 무엇보다 운동의 와중에 수없이 마주치게 될 실패와 패배를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운동 그 자체를, 그 과정을 즐기고 이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장 결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운동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자세를 불교 사상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빗대곤 한다. 결과(相)에 집착(住)하지 않으며 다만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활동가의 자세라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다며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 운동에서 개인적 명예를 얻겠다는 마음 등도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또는 량치차오(양계초)가 '생활의 예술화'를 말하며 무목적적으로 삶을 즐겨야 한다고 한 것을 참고해도 좋겠다. 사실 장자도 '행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말했을 만큼, 이는 좋은 삶을 사는 일반적 원칙이라 할 수 있는데, 활동가에게는 특히 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 : 이상우, 2014, 《중국 미학의 근대》, 아카넷)


문제는 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기에, 활동가는 계속해서 목적의식을 가져야만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욕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결과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다. 요컨대, 좋은 운동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목적의식과 결과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하지만, 활동가로서 운동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를 도식적으로 시점을 구분해서 말하자면, 운동을 계획하고 실천할 때는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지만, 이미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잘되었든 아니든 그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병립시키는 것이 활동가에게 필요한 자세이다. 모순이란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활동가의 건강함과 균형감각이 비롯된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② 자기 만족과 책임


활동가에게 필요한 이와 같은 모순을 다른 형태로 표현한다면 자기 만족과 책임의 양립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의도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가끔은 더 나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운동의 신념과 대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활동가로서의 자기 만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 만족이, 우리 운동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운동은 의도나 대의가 올바르기에 그 결과가 안 좋더라도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라고 회피해선 안 된다. 우리는 현실의 정세와 상황을 고려하며 운동을 해야 하고 우리의 활동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어떤 작용을 할지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결과에 대해서 나름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라는 문구가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아차린 이도 있을 것이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라는 개념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이야기한 바 있다. 정치가에게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활동가는 국가의 강제력/폭력에 직접 개입하는 정도가 적다는 점에서 정치가와는 상황이 좀 다르고, 비교적 책임 윤리의 무게감이 덜하기는 하다. 그러나 활동가 역시 넓은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이며, 법을 만들고 없애고 바꾸는 데 개입하곤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동시에 가져야 할 것이다.)

(*참고 : 막스 베버, 전성우 역, 2019,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활동가는 자신이 하는 운동으로부터 자기 만족을 얻으면서, 동시에 (대개는 그리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책임감도 가져야만 한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있는 것을 양립시키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각각의 덕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나는 활동가의 만족이 순전히 운동의 과정이나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비롯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활동가의 만족은 자신이 하는 운동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바라는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목적의식과 전망으로부터 비롯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활동가로서 자신의 운동과 삶에 만족하되 자신의 운동이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운동을 견디면서 세상을 바꾸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