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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Feb 23. 2019

위계와 차별을 낳는 '나이'

청소년운동이 문제 제기하는 나이주의

예전에 같은 청소년운동단체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이런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30대였던 그 사람의 집에 10대 활동가들이 방문했다. 그런데 10대 활동가들이 가고 난 뒤, 그 사람의 가족이 그 사람을 크게 나무랐다. 어린 애들이랑 서로 반말을 하고 지내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둘 무너지면 사회에 질서가 없어진다."라는 등의 말을 했다고도 했다.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운동단체에 처음 와보고 사람들이 신선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높임법'이다. 분명히 20대인 회원인데도 초등학생 회원과 서로 반말을 하고 '언니'나 '형' 같은 호칭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나든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존댓말과 반말이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를 반영하지 않고, 친소(親疎)에 따라서만 사용되는 것이다. 형, 누나, 언니, 오빠 같은 호칭도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 학교에서나 직장 등에서 학년 하나, 나이 한 살 차이로 선후배와 위아래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문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이런 문화를 낯설어하고 때론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특히 동갑인 사이에서만 '친구'가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듯 보이는데도 서로 '친구'라고 말하는 활동가들을 보고 놀라곤 한다. 상대의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초면에 존댓말을 쓰는 활동가들을 보고 어색하게 느끼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아무리 나이가 적은 상대여도, 1세이든 5세이든 상관없이 존댓말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이가 적은 상대방이 나에게 반말을 써 오면(말이 서툴러서이든, 나를 친밀하게 느껴서이든) 같이 말을 놓기도 한다. 어쨌건 관계에서는 상호성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가 아무리 많은 상대여도 나에게 일방적으로 반말을 써 오면 불쾌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고 존댓말을 요구하기도 하며, 그러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두는 편이다.


나이 따지는 사회


나이에 따른 호칭과 경어 사용 등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관계와 역할을 나누고 차별을 만드는 사회적 질서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나 나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몇 년생이냐고 묻든 몇 살이냐고 묻든 띠를 묻든,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이나 높임법을 어떻게 할지 정리하는 것은 관계맺기의 기본 단계다. 더 나아가서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들 사이에 위아래가 생기고, 각기 다른 역할을 요구받으며, 차별이 일어나기도 한다. 경어(존댓말)나 평어 그리고 하대(반말)는 나이에 따라 위아래를 나누고 수직적 위계를 만드는 것을 가시화하는 대표적 요소다.


나이에 따른 이런 사회적 현상, 그리고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나이주의(ageism)'라고 부른다. '인종주의'나 '학벌주의' 같은 모양새의 조어인 셈이다. 나이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의해 볼 수 있다. ▲ 나이에 따른 수직적 위계, ▲ 나이에 따른 연소자나 연장자에 대한, 나아가서 청소년과 노인에 대한 차별, ▲ 나이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거나 과업을 부여하는 등 생애 주기 담론. 정희진은 이에 더해서 '늙음'이나 '어림' 등 나이 관념이 차별과 타자화의 은유로 쓰이는 '차별의 연령화'도 나이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들기도 했다.


우리가 나이주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창 만들어가던 초창기에, 어떤 분이 “나이주의라는 게 있기는 한 개념이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실제로 ageism은 영어사전에도 등재돼 있고 학계에서도 쓰이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주로 '고령자·노인 차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국에도 〈연령차별금지법〉이 2009년 제정돼 시행되고 있는데, 정식 명칭은〈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로 이 역시 주로 고령자·노인에 대한 차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의 사회복지학 등에서도 ageism은 주로 '연령주의'라는 번역어로 노인 차별에 관련해서 사용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나이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1969년 이 말이 제안된 이후로 계속 넓혀져 왔다.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정해진 생애주기를 강요하고 여성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나이주의의 개념을 사용했던 바 있다. 여성학자인 정희진이 한국에서 나이주의 문제를 정리하여 지적한 주요 논자 중 하나인 이유이다. 청소년운동에서는 저연령·아동·청소년에 대한 차별, 나아가서 연령대에 따른 이미지 등까지 나이주의 개념으로 묶어서 들여다본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서구 사회에 비해 더 심한 측면도 있어서, 나이주의를 논하면서 '장유유서' 같은 관념이나 나이에 따라 위아래를 가르는 위계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이주의 문제를 겪고 있다. 나이주의를 비판하고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지금은 주로 청소년운동이긴 하지만, 나이주의는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이를 이유로 일할 때 더 안 좋은 대우를 받는 것, 10대들이 집회에 참가하면 "애들은 공부나 해라" 하거나 노인들에게 "손주들이나 보지, 용돈 받고 조종당해서 나왔느냐"라고 하는 것, 35살 미만 가구는 전세대출 지원에서 차별받는 것, 40대인데 미혼·비혼인 사람을 뭔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것 등 나이주의의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나이에 따른 '갑질'


나이주의는 직접적인 폭력을 낳는다. 정당화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인 체벌이 대표적이다. 또한 대학생들 사이에서의 '군기 잡기' 사건 같은 것도 그 예다. 소수의 기괴한 사례들이 아니더라도 선후배 간의 폭력이나 차별, 통제 등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나도 고등학교에서 선배들이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이유로 '단체기합' 등을 가했던 경험이 있다. 군사주의와 권위주의적인 문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나이나 학년에 따라 계급과 서열을 짓는 구조가 있다. 학교 밖에서도,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무례나 무시를 당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나이주의에 따른 위계와 사회적 배치는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질 것이 요구되고,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상급자로 여겨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또, 예를 들어 카페에서의 접객 등의 일은 보통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하는 일로 인식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잘 채용되지 않는다. 이는 주로 젊은 사람이 접객을 하는 게 더 보기 좋다는 편견에 더해, 다른 사람을 맞이하고 '시중을 드는(serving)' 일은 주로 '아랫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접객을 하는 사람을 더 함부로 하대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일이 잦기도 하다. 


이처럼 나이주의하에서 나이에 따라 인격을 모독하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나이 갑질'이라는 이름을 붙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소위 '갑질' 사건을 보면, 그러한 갑질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그 배경인 상하관계 자체는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갑질 문제가 갑을관계 자체를 교정해야 해결될 수 있듯이, 나이 갑질 역시 나이 위계 그리고 나이주의 자체를 교정해야 없어질 수 있다. 또한 무리한 나이 갑질의 배경에는 "버릇 없는 요즘 애들"에게 나이 위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감도 발견할 수 있다. 역으로 나이를 내세우며 나이 갑질을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노인 혐오의 심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특정한 세대나 사람들의 문제라고 볼 게 아니라, 나이주의라는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나이는 인간을 규정할 수 없다


나이주의는 감각의 문제다. "나이 많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되지?"라는 말 속의 편하다는 것은 나이주의 속에서 학습된 감각이다. 반면 "서로 편하게 존댓말 하시죠?"란 대꾸는 나이주의 속에선 불편하게 느껴진다. 상대의 나이를 신경쓰지 않고 만나는 게 당연히 더 단순하고 편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또한 나이주의는 국가와 경제 논리의 문제다. 어릴 때는 학생답게 학교에 다니고, 젊을 때는 결혼하고 일을 하고, 늙어서는 퇴직하는 흐름을 규범으로 만든다. 경제활동을 하는 인적 자원을 강조하면서, 노인은 평가절하되고 청소년은 투자를 받는 예비 인재 취급을 받는다. 그러므로 나이주의와 맞서는 일은, 교육체제나 경제구조를 건드리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지배적인 감각을 바꾸기 위한 일상의 싸움이기도 하다.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듦이 잘못인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나이 이전에 각자의 삶을 만들어갈 권리가 있다. 나이는 하나의 참고 사항이거나 살아온 시간을 반영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 우열의 이유는 될 수 없다. 나이에 따른 차별과 위계는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차별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다른 차별과 결합하여 문제를 증폭시키기도 하고, 나이주의적 생애 주기 속에서 경직된 삶을 살다 보니 사회를 바꾸는 일이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청소년이 '미성숙'하고 나이 들수록 성숙해진다는 관념, 비청소년과 청소년 사이의 상하관계 등은 나이주의를 이루는 원형 중 하나이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에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 있는 운동이다. 한국에서도 노인인권운동이 더 활발해진다면 청소년운동과 같이 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운동이나 노동운동 등도 나이주의 문제와 직접 얽혀 있다. 나이주의는 사회재생산과 교육·노동·복지 등이 얽힌 사회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의식 위에서 근본적인 나이 평등을 지향하는 실천이 가능해질 것이다. 성별이나 장애에 따른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대론이나 청년론보다도 나이주의


2014년쯤, 인권교육을 가기로 한 학교에서, 이력서를 보니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20대의 '새파랗게 젊은' 강사가 아무래도 못 미더웠나 보다. 혹은 청소년 활동가가 더 나이 많은 교사들을 가르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거절당한 경우도 있었다. 교원연수에서 교사들이 나이가 적다고 해서 청소년활동가와 인권활동가를 깔보고 막 대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몇 번을 당해도 불쾌하지만, 그럴 때면 역시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며 나이주의의 논리가 얼마나 부당한지 느낀다. 미성숙한 어른들에게 화를 내서 뭐하겠는가?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수밖에.


최근에 "나이가 많아도 초면에 존대하는 사람은 좋게 보라"는 조언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공적인 관계에서나 낯선 관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상호 경어를 써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 나이 위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는 듯싶다. 그래도 아직 본격적으로 나이 평등을 말하는 것은 낯선 일이고 거부감을 사기 십상이다. 또한 일상적 문화 이상으로 나이에 따른 다양한 억압과 차별의 문제들은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세대론'이나 '청년'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이 남발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보다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나이주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건드리는 게 좀 더 영양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나이가 차별이나 억압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고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2012년 2월 《한겨레21》에 썼던 글과 2015년 3월 《한겨레》에 썼던 글을 합치면서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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