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성에 대한 호들갑은 이제 그만
청소년들의 성 문화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소리를 곧잘 듣게 된다. '요즘 애들'에 대한 한탄으로는 새로울 것 없는 레퍼토리이긴 한데, 근래에는 학생인권조례나 차별금지법 등 사회적 이슈와 연관해 좀더 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다.
전반적으로는 이런 식의 이야기다. 몇몇 자극적인 사례를 보이며 청소년들이 이렇게 지금 ‘문란’하다고 개탄한다. 청소년들의 첫 성경험 연령이 평균 12.8살이라는 조사(질병관리본부)를 거론하기도 한다. 학교의 연애 탄압 규칙을 비판하거나 청소년의 성을 규제하려는 것에 문제 제기라도 하면, 청소년들이 어찌 성에 대한 것까지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느냐며 심각한 사회 질서 붕괴라는 듯이 규탄한다. 그러면서 보수적인 거부감과 편견에 기대어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일단 이런 호들갑은 어느 정도 과장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듯하다. 예컨대 청소년의 첫 성경험 연령에 대한 조사결과는, 실은 성경험이 있다고 답한 약 5%의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낸 평균이다. 해당 조사에서 대다수인 95%는 아직 성경험을 해보지도 않았다고 답했다. 실제로 현재 10대인 특정 세대의 첫 성교 경험 연령을 추적 조사한다면 평균 20살 이상이 될 가능성도 꽤 높으리라. 내가 만나본 경험으로는 적지 않은 청소년들은 성에 관해 경험도 별로 없고 두려워하거나 방어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라. 청소년들의 성 문화나 의식 등은, 자연스럽게도 우리 사회 전체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불행한 일이지만 말이다.
또한 학생인권조례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우리 사회가 굉장히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처럼 걱정하는 것도 견강부회이다. 차별금지법은 교육기관이나 노동 현장 등에서 장애, 병력, 외모, 나이, 출신 국가, 인종, 언어, 성별,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학력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학생인권조례상의 차별금지 조항도 마찬가지다. 성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임신 또는 출산의 이력 등을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유와 평등을 표방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한 일이다. 이로 인해 직접적으로 성 문화가 변화하거나, 성 관련 도덕이 붕괴하지도 않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사생활의 자유 등의 조항 역시 학생의 사생활이나 (연애를 포함한) 인간관계에 대해 존중해야 하며, 강제로 처벌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람직한 관계맺기나 연애 방식에 대한 교육활동이나 대화, 논의는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성적 도덕을 붕괴시킨다는 논리는, 마치 예전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했듯이 경찰이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이성교제'하는 청소년들을 잡아가지 않으니 우리 사회의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국 청소년들이 부딪히는 성에 대한 규제와 금기 아닐까? 학생들이 팔짱만 끼고 다녀도 처벌하는 학교들도 아직 비일비재하고, 청소년들은 콘돔 하나를 사려고 해도 포털사이트나 약국 등에서 거부당하기도 한다. 정부에서는 자위용 도구나 기능이 부가된 콘돔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물건이라고 규제한다 성소수자에 관한 표현이나 행사도 규제를 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 청소년의 성을 쉬쉬하고 억압하려고 하는 이런 모습은 참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청소년의 성(性)적 자기결정권을 자의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들을 일종의 '성범죄'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이미 인권으로 공인되어 있다. 헌법재판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기본권 중 하나임을 인정한 게 20여 년 전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에서, 성(性)은 일반적이고 중요한 요소임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판단이다. 연역적으로 생각해보라. 성적 자기결정권이 인권이자 기본권이고, 청소년도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청소년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거부할 권리,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해 정보를 얻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권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권리들을 하나의 인권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잘 보장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또는 어쩔 수 없이 제한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등을 논의해볼 수가 있다. '보호'를 외치다가 정작 청소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빼먹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볼 수도 있다. 무조건 '어린 것들'은 성에 대해 접근해서도 알아서도 안 된다는 식의 태도를 벗어나서 말이다.
"청소년의 섹스할 권리"라는 말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무슨 큰일이 난 듯 구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더라도, 일단 그러한 권리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 중 상당수가 성에 관심을 가지고 성적 경험을 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같은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무슨 충격이고 범죄이고 사라져야 할 일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청소년을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면 대개 "너희가 뭘 아느냐?", "임신이라도 하면 책임질 수 있느냐?"란 비난이 돌아오곤 한다. 그러나 성적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은, 성에 대해 잘 알도록 정보를 공유하고 교육의 기회를 만들자는 뜻이기도 하며, 임신을 하게 되면 그에 관한 부담을 사회가 함께 나누고 지원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청소년의 성을 권리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간섭 없는 자유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환경과 지원의 문제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에 대한 논의는, 개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그 방향과 기준의 문제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비난하고 두려워하는 사회보다는, 누구든 평등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좀더 부담 없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더 자유롭고 좋은 사회일 것이다.
※ 2015년 2월 〈한겨레〉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