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것이 시민적인 것이다
2018년 하반기에 서울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인권페스티벌에서 진행하는 한 행사를 준비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아니었지만, 페스티벌 전체 진행 상황을 공유하다 보니 부스 구성 이야기도 나왔다. 처음 기획안에서는 '표현의 자유', '학교에서의 권리', '보호의 권리', '여가와 놀 권리'라는 4개의 주제로 각 4개씩 부스를 차리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참여하는 수련 시설 등 청소년 관련 기관들 중에서 '보호의 권리'를 선호하는 측이 많아서 '보호의 권리' 파트만 7개가 되었고, 대신에 '학교에서의 권리'는 2개로 줄었단다. 청소년 관련 시설이나 기관이 선호하는 청소년인권 문제가 무엇인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처럼 보였다.
아동/청소년 인권 문제는, 큰 흐름으로 보면 본래 '보호의 권리'에서부터 시작해서 확장되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4년 〈아동 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 1959년 〈아동 인권 선언〉 등에서 강조된 것은 보호받을 권리, 생존할 권리, 교육에 대한 권리, 적절한 주거와 의료에 대한 권리 등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UN 아동 권리 협약〉에 이르러서 (18세 미만) 아동에게도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참여의 권리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중요한 인권임을 명시하게 되었다. 〈UN 아동 권리 협약〉도 전문에서 "특별한 보호와 배려를 필요로 한다"고 밝히고 있긴 하지만, 표현의 자유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 자유권이 포함되게 된 것은 아동관의 큰 변화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인권 일반의 역사는 보통 자유권에서 시작하여 사회권으로 권리의 목록이 확대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예컨대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 신체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 등을 주요한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다가 생계를 보장받는 것, 기초적인 교육에 참여하고 의료를 받고 건강하게 사는 것 등이 인간의 권리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는 국가에게 소극적 의무, '개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말 것'(인권에 대한 존중)을 요구했던 데에서 적극적 의무, '개인의 권리를 지원, 실현할 것'(인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변해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의 인권 논의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비장애인 남성들이 주도한 것이었고, 이후에는 노동자, 빈민, 여성, 장애인 등이 평등을 요구하고 투쟁하며 인권의 영역을 확대시켜 온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동/청소년 인권의 역사는 마치 인권 일반의 역사와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발전해 온 듯이 보인다. 애초에 아동 인권에 관한 논의가 아동을 인간/시민으로 인식하고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이자 '예비 시민'인 아동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배경내는 논문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아동 - 아동 인권의 완전한 실현을 위한 조건의 탐색〉(2003)을 통해 "아동은 '개인'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이 되기 위해 준비되어야 할 존재이자 아동으로부터 개인으로 성숙하는 동안은 일정한 사회적 제도 내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간주되어 왔"다고 지적하며, 아동이 인권의 보편성을 논의하는 데서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집단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초창기 아동 인권의 논의는 '인권'의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보편적 인권 보장의 취지나 논의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아동의 인권을 주장하는 일은 이중의 과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보호의 대상'이라는 틀을 넘어 자유와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보호받을 권리'로만 여겨져 온 아동의 사회권을 재구성하여 보장받는 일이다.
한국에서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도 '보호의 대상'으로만 생각되어 왔던 아동/청소년(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보호 체계가 청소년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한 성과는 분명히 있다. 청소년은 과거에 비해서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가족과 부모와 학교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노동 착취는 감소했고, 청소년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폭행이나 방임은 범죄시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청소년에 대한 '보호' 정책이라는 것들이 많은 부분 시혜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의 성격을 띤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한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나 스마트폰 청소년 유해물 차단 프로그램 등은 청소년의 사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감시·통제하는 성격이 있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중 포털 사이트 검색어나 메시지 중 특정 키워드를 감시하는 것은 명백한 사생활의 자유 침해이다. 학교가 청소년의 연애나 흡연 등에 가하는 처벌 등도 청소년 보호가 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처벌로 이어지는 예이다.
이런 논리는 발전하면, "청소년 보호를 위해 두발 복장 규제를 해야 한다", "청소년 탈선을 막기 위해 강제로 야간 학습을 시켜야 한다", "장래를 위해 강제로라도 공부를 시키는 것이 청소년을 위한 일이다"라는 데까지 나아가고, 심지어 청소년들이 정치적 집회나 정당 등에 참가하지 못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사실상 청소년의 각종 자유를 제한하는 데 '보호'가 구실로 사용된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건강권이나 교육권, 안전할 권리 등을 우선한다는 이유로 정치적 자유나 사생활의 자유 등을 제약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면서도 해당 사안에 대해 긴급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호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 보호'는 그다지 긴급하지 않은 문제까지 굉장히 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유해물질이나 유해한 환경으로부터의 보호, 건강, 학습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 정치 및 사회 활동 제한, 미디어에 대한 제한 및 심의 등이 모두 청소년에 대한 '보호'라 생각된다. 안전 문제, 건강 문제, 교육 환경의 문제, 폭력·학대로부터의 구제, '바람직한 가치관'의 교육이나 선도 문제 등이 모두 '보호'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호'는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조치들이 더 쉽사리 용인되도록 하는 '포장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보호'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넘어서는 것은 청소년운동의 주요 과제였다.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대해지는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교육권이나 건강권, 생존권 등은 이미 국가에서 우선적으로 지원받는 경우가 많기에 한국 현실에서는 운동의 과제로 좀 더 후순위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운동이 청소년의 사생활과 자유시간에 대한 권리, 참정권 등을 주로 운동의 의제로 다루고 강조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청소년 참정권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2016년 4월 총선 당시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소년단체 선언 현장.)
그렇다고 해서 자유권 외에 청소년인권은 잘 보장된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보통 인권의 성질 중 하나로 '불가분성'을 꼽는다. 이는 인권은 따로따로는 온전히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나 여가 시간 없이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있다고 해 봤자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결사를 만들거나 집회를 가지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는, 평등한 교육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더 풍부하고 평등하게 보장될 수 있다. 사회권에 관해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치적 권리 없이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고 노동권을 신장시킬 수도 없다. 참정권은 시민들이 복지 정책을 요구하고 사회권을 현실화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청소년의 인권 역시 불가분하기에, 청소년을 인간/시민으로 존중하지 않는 조건하에서는 청소년의 사회권 보장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가령, 한국 사회는 '높은 교육열' 속에 청소년에게 교육권이 잘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청소년을 총체적인 교육에 대한 권리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년을 단지 '교육의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일방적으로 정해진 학교교육을 받게 하며 공부를 많이 하게 할수록 교육이 잘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육에 대한 권리를 실현하는 적절한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또 다른 예로, 청소년의 주거권은 어떠한가? 청소년은 가족에 속한, 친권자의 보호하에 있는 존재로 간주되며 청소년의 주거권도 가족과 함께 살 권리, 친권자가 지정한 집에 같이 살 권리 정도로만 인식된다. 가정의 보호 밖으로 벗어난 청소년은, '가출 청소년 문제'라는 사회 문제로 다루어진다. 그런 접근에서는 청소년의 주거권 등의 존재 가능성 자체가 지워진다. 독립적 생활의 가능성도, 대안적 가정의 가능성도 정책적 고려 대상이 되기 어렵다. 노동 착취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일부 제도는 청소년의 노동 기회를 줄이고 청소년을 노동 관계에서 더욱 약자로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처럼 청소년 인권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비판하는 것은, 청소년에게 보호나 사회권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보호받을 권리'가 필요하다. 사고나 재난을 예방받거나 구조받을 권리, 범죄로부터 지켜질 권리, 유독/유해한 환경에 처하지 않을 권리 등은 모두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이를 '안전할 권리', '건강권', '신체의 자유' 등으로 이야기한다.
주로 '성숙한 보통의 사람'이라고 전제되지 않는 이들, 여성/청소년/장애인 등에 관련해서만 '보호'가 강조되고 그들의 특별함이 부각된다. 그런 식으로 권리의 주체가 되는 이들과 보호의 대상으로 불리는 이들 사이, 온전한 시민으로 대우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구분선이 그어진다. 청소년이 사회권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 구분선을 지우고, '청소년 보호'라는 틀을 깨고, 청소년의 안전할 권리, 건강권, 발달권, 노동권, 교육에 대한 권리란 어떤 것인지 다시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시민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제대로 된 사회권을 보장받고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사회적 공공성, 사회권의 보장은 더 나은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이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시민은 독립적이고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이다. 각자도생이 아닌 책임의 공유와 분산이 당연한 사회, 살아남기 위해 경쟁과 차별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욱 자유로운 시민,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고 참여하는 시민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이 시민으로서 대우받고 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를 유예하고 경쟁에 몰입해야 하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또한 청소년에게 여가 시간과 경제적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장래를 준비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하는 삶은 시민으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청소년의 삶만 바꾸어서 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가능해질 변화이다.
청소년이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받고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복지 제도와 교육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권을 강화하는 것이 먼저일지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이는 마치 나비 모양의 리본 매듭처럼 양쪽을 동시에 붙잡고 당김으로써 풀어 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존중받고 자유로워지는 것과, 청소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하게 만드는 것은 같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그 과정이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가둬 놓던 과거와는 다른 방향, 다른 방식으로 걸어가는 길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어린이책시민연대 《어린이책과 삶》2019년 65·66호에 실었던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