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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Mar 21. 2019

'노키즈존'에 없는 것

차별에 무감각한 사회를 우려하며

2014년 경기도 수원에 살 적, 집 근처의 한 카페에는 "정숙한 실내를 위해 12세 이하 아동 출입 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2019년, 서울에서 나름 번화한 동네에 위치한 우리 집 근처 식당에는 "저희 업소는 안전사고와 성인 손님의 배려를 위해 영유아 및 어린이 출입을 제한합니다."(비문이 거슬리지만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다.)라는 안내문이 큼직하게 붙어 있다. 최근에 많아졌다는 어린이·청소년 금지 가게, 이른바 '노키즈존(No Kids Zone)'이다. 노키즈존은 언론에서는 주로 5살 미만 출입 금지라고 소개되곤 했지만 실제로 노키즈존을 내건 가게들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입학, 10살, 12살, 13살, 15살 등 나이 기준은 다들 다르다. 금지의 이유도 다양하다. 어느 곳은 정숙함이나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하고, 어느 곳은 안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노키즈존'을 표방하는 가게들은 계속 늘고 있는 듯하다.



사회적 차별 금지의 원칙


물론 영업자에게는 영업 방침을 정할 자유가 있다. 손님에게 물건이나 서비스를 팔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영업자의 재량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회적인 한계가 있다. 영업 활동이 법을 지켜야 하듯이, 보편적인 인권의 원칙, 차별 금지의 원칙 등도 지켜야만 한다.


예컨대 '흑인 출입 금지'를 내건 식당이 인종차별로 문제가 될 것은 분명하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는 재화와 용역의 제공 및 이유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배제, 거부 등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영업 방침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 빈틈없는 기준을 세우는 건 쉽지 않겠으나, 특정 집단 전체를 사전 차단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조치라고 일단 의심해볼 만하다. 더구나 어느 한두 가게의 컨셉이 아니라 사회적 추세로 어린이·청소년을 배제하는 가게들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충분히 문제라 봐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2017년 13살 이하 어린이·청소년의이용을 제한한 식당에 대해서 "나이를 이유로 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차별 행위"라고 판단하고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사업주들의 영업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하며, 식당 사업주가 "일부 아동의 산만한 행동이나 보호자의 무례한 행동을 이유로 모든 아동 및 아동을 동반한 보호자의 식당 이용을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일부의 사례를 객관적·합리적 이유 없이 일반화한 것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영업장이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소음을 일으키는 손님에게 주의를 주거나 나름의 룰에 따라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영업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적·제도적으로 이용을 제한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공간들이 늘어나는 것은 또다른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이나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삼아, 영업자가 자의적으로 입장과 이용을 사전 차단해버리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행위이다. 가게들에 붙어 있는 “노키즈존” 알림은 그러한 차별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무시당하는 청소년의 존재


지금까지 노키즈존에 대한 논란은 대체로 보호자와 양육에 관련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불만을 말하는 인터뷰이도 대개 '엄마'로 소개되고, '무개념 부모'의 사례가 쟁점이 된다. 어린이·청소년을 동반하여 갈 식당 등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도 어린이·청소년과동행하는 비청소년, 보호자 등의 불편으로 주로 이야기된다. 노키즈존 문제가 육아에 대한 사회 문화의 문제인 것은 맞다. 노키즈존을 옹호하거나 요구하는 여론은, 사회적으로 양육과 공존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또 다른 당사자인 어린이·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너무 없는 것 아닐까? 언론 기사 등에선 정작 출입 금지 대상이 된 아이들의 이야기는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들을 가리켜 시끄럽고 위험한 존재라고 하며 출입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른들'은 그들에게 묻지 않는다.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라는 측면에서는 어떤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어린이·청소년들은 단지 부모가 잘 관리하고 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어른들의 기준에 맞춰야 할 존재로만 언급된다.


2019년 3월, 과거에 동화 작가이기도 한 어린이·청소년 당사자인 전이수 씨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던 글이 화제가 되었다. 동생과 같이 생일에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노키즈존이라고 입장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전이수 씨는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사건은 노키즈존이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차별 행위가 되는지 새롭게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차별은 보통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쉽게 가해지곤 한다.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지고, 차별 행위가 쉽게 용인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키즈존’ 문제에서는 어린이·청소년의 존재가 지워져 있었기에, 이는 마치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양육자의 예의나 능력, ‘민폐’에 관련된 문제인 양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차별은 어린이·청소년뿐만 아니라, 장애인 등 다양한 약자들에게도 향하곤 한다. 실제로 한 식당에서 청각 장애인의 예약을 거절하면서 "노키즈존 같은 것이다"라고 발언한 사례도 있었다.


노키즈존에 없는 것


노키즈존이 늘어나는 배경에는 일종의 '어린이·청소년혐오'가 있다. 어린이·청소년들을 통제할 수 없으며 민폐를 끼치는 존재, 어른들의 세계에서 배제할 타자로 보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노키즈존 관련 결정에서 인용한 바 있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 17(2013년)도 이러한 문제를 언급한다. 여가와 놀 권리 등의 문제를 다루는 그 일반논평에서는 야간 출입 금지, 소음에 대한 관용 감소, 상가 출입 제한 등을 거론하면서 공공장소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줄어드는 경향이 어린이·청소년들의 놀이·문화 활동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어린이·청소년들을 '문제' 또는 비행을 저지르는 존재로 여기게 하며 청소년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언론매체와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공장소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이 배제당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스스로를 인권을 가진 시민이라고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소수자란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소수자는 주류의 기준에 맞추기를 요구받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배제를 당한다.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질수록 보통 그 '기준'이란 더 깐깐해지고 배제는 더 쉽게 지지를 얻는다. 여유가 없는 만큼 거슬리는 것들을 더 용인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확산되고 있는 노키즈존에 없는 것은 단지 '아이들'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공존하려는 여유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소수자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와 차단이 일종의 차별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없다. 어린이·청소년도 공존하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없고, 어린이·청소년의 출입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감각이 없다. 노키즈존이 너무나 쉽게 늘어가고 이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은 모습이 두려운 이유이다.




※ 2014년 11월에 《한겨레》에 썼던 글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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