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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May 13. 2019

아동수당은 아동의 권리인가

어린이·청소년의 경제적 권리와 주체성을 강화하는 제도가 되기 위해

"아동수당은 아동의 권리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아동수당 안내 웹사이트에 큼직하게 적혀 있는 글귀다. 한국은 2018년 9월부터 소득 및 재산 상위 10%인 가정을 제외하고 만 6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 월 10만 원을 지급하는 아동수당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2019년 1월 1일부터는 만 6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 친권자(부모 등 보호자)의 소득 등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2019년 9월부터는 만 7세 미만의 아동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아동수당은, 정부가 특정 연령 미만의 아동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복지제도이다. 출산 유인을 위하여 그 가정의 둘째나 셋째 아동에 대해서는 조금 더 큰 금액을 지급하는 사례도 있다. OECD 국가들 중 한국까지 헤아려 32개국이 시행 중이다. 한국이 이제라도 아동수당을 시행하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그 액수가 10만 원으로 적은 편이고, 수당을 받는 범위도 (2019년 9월에 확대된다 해도) 만 7세 미만까지로 매우 좁다. 그나마 최초 시행 당시 있던 소득 및 재산에 관한 선별 기준이 폐지되어 소득 등 선별 없이 보편적으로 지급하게 되었기에 아동수당은 '아동의 권리'라고 불릴 만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보건복지부 웹사이트에서 아동수당은 아동의 권리라고 안내하고 있다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동수당이 정말로 '아동의 권리'로 자리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아동수당은 저출산 대책이 아니다 


아동수당이 제안되고 도입된 배경으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저출산 현상이다. 아동수당은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2006~2010년) 수립 과정에서 거론되었고, 이후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에서도 제안이 나온 바 있으며, 2018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아동수당 확대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아동수당 공약을 '안심 육아 대책'의 일부로 발표했는데, 대선 후보들의 아동수당 공약은 이처럼 육아 부담을 덜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으로, 저출산 현상에 대한 대책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아동수당에 관한 논의도 대개 아동수당이 출산율 제고에 효과가 있느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언론 기사들을 보아도 주로 아동수당으로 양육의 부담이 덜어질지, 부모들이 '아이 낳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아이를 좀 더 낳게 될지 등이 문제가 된다. 그러다 보니 아동수당이 의미 있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아동수당이 출산율 제고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을 거라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본래 아동수당 제도의 첫 번째 목적은 출산 유도가 아니라, 아동의 생존과 인권 보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작 아동수당이 아동의 인권 개선에 얼마만큼 효과를 보일지 따져보고 평가하는 경우는 언론 기사나 정책 토론회 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애초에 아동수당을 친권자의 소득 및 재산을 기준으로 차등하자는 주장도, 아동수당을 아동의 권리가 아니라 '친권자에 대한 지원'으로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동수당이 만 7세 미만(초등학교 취학 전)에 대해서만 지급하는 형태인 것은, 결과적으로 아동수당의 의미를 출산 직후 영유아에 대한 양육을 지원하는 것으로 한정짓고 있다. 지금처럼 아동수당이 저연령의 영유아를 돌보는 친권자를 보조하는 것으로만 인식된다면, 아동수당의 대상 연령 등을 확대하도록 설득하기도 더 어려워질 수가 있다. 



아동에게 보장되는 소득 


아동수당은 직접적으로는 아동의 생존과 건강한 삶,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정한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취지이다. 일단 가정에서 아동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또한 아동을 돌보는 데는 시간과 노동력도 쓰이기 때문에, 친권자의 경제 활동을 줄여야 해서 가정 소득도 줄어들 위험성이 있다. 이 때문에 아동수당을 지급하여 아동이 있는 가정이 빈곤해지는 것을 예방하고 아동이 살기에 바람직한 환경이 조성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아동수당을 통해서 가정 안에서 아동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간접적으로 아동의 인권을 지지하는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 1월, 보편적 아동수당 도입을 환영하는 성명에서 아동수당의 의의를 "모든 아동에게 아동수당을 지급함으로써, 부모뿐만 아니라 사회가 함께 분담해 아동을 양육하는 제도를 만들어 아동 양육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으며 "아동이 부모 등 보호자에게 종속되지 않게 해 아동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한다고 짚었다. 양육과 돌봄의 공공성이 곧 아동의 주체성으로 연결된다는 적절한 지적이다.


아동을 돌보고 기르는 일이 각 가정의 사적인 일로 여겨질수록, 아동은 친권자의 소유물처럼 생각되기 쉽다. 친권자 자신도 아동 부양에 드는 돈과 노력을 개인의 희생과 헌신으로 받아들일 개연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아동이 친권자의 통제에 따르기를 바라고 성취감이나 미래의 경제적 부양 등으로 대가를 얻기를 바라는 것으로 표출되곤 한다. 아동도 친권자에게 죄책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종속된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한국에서 가정 안에서의 아동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낮은 현실, '효'를 강조하며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상황,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다'고 하며 어린이·청소년들이나 그들이 갖기를 원하는 물건 등을 '등골 브레이커'라고 부르는 혐오 표현 등은 이러한 실태를 보여 준다.


아동의 생존과 권리 보장을 위해 국가가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아동의 삶과 아동에 대한 돌봄이 사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 공공의 문제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국가인권위가 아동수당이 권리 주체성 강화에도 기여한다고 한 것은, 아동에 대한 돌봄이 친권자의 희생이 아니어야 하며 동시에 아동이 친권자의 소유물이 아닌 시민적·사회적 권리의 주체여야 함을 환기시킨다. 양육과 교육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강화되는 것이 전반적인 아동 인권이 진보하기 위한 조건인 이유이다. 물론 아동수당 제도 시행이 곧장 저절로 이러한 의식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아동수당 시행과 함께, 아동학대에 대한 적극적 개입 등 아동 인권 보장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아동수당을 아동 본인이 받아서 쓸 수 있다면…

 

실제로 아동수당을 시행 중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한국의 아동수당과는 정책의 성격과 맥락이 꽤나 달라 보인다. 예를 들어 독일은 만 18세 미만 아동에 대해서, 아동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아동수당이 지급되는데, 학생이거나 직업훈련 중이라 소득이 없는 경우에는 최대 만 25세 이하의 사람들에 대해 지급된다. 핀란드는 만 17세 미만 아동에 대해서는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만 17세 이상 25세 미만인 아동도 학생이라면 학생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 학생수당은 독립하여 혼자 사는 경우나 자식이 있는 학생의 경우에는 더 큰 금액(2017년 기준 최대 월 약 33만 원)을 지급받는다. 아동수당을 시행하는 많은 국가들이 만 16세나 만 18세까지 아동수당을 기본적으로 지급하고, 그중 독일, 핀란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룩셈부르크 등 여러 국가들이 학생이거나 소득이 일정 이하인 경우에 연장하거나 확대하여 지급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아동수당을 단지 양육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경제 활동에 제약을 받는 어린이·청소년·청년의 생계와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아동수당 역시 그 범위도 의미도 확대되어야 한다. 현재는 주로 저출산 대책이나 양육을 지원한다는 관점에서만 논의되고 있지만 아동수당을 진정으로 "아동의 권리"라고 하려면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아동수당은 아동이 이 사회의 시민이지만 신체적·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충분한 경제력을 가지기 어렵기에 국가가 생존과 건강 등 사회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소득을 보조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친권자가 이를 대리 수령하고 이용하더라도, 아동수당은 원칙적으로 아동에게 보장되는 소득이라고 보아야 옳다. 사회 구성원의 생존과 존엄성을 위해, 국가와 사회는 소득과 사회안전망을 보장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인이 아닌 아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경제적 약자이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야말로 이러한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언젠가는 아동수당이 만 18세 또는 19세까지 지급되고, 소득이 일정 이하라면 20대까지도 지급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청소년·청년들이 경제적 권리를 보장받는 시민으로 생활하기에 의미 있는 금액으로 지급액을 인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아동이 원한다면 아동수당을 친권자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받아서 스스로를 위해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기를 꿈꿔 본다. 관공서 행사에 노동력을 제공한 청소년에게 현금을 지급하면 '교육적이지 못하다'며 돈 대신 문화상품권이나 봉사시간확인증을 지급하고, 학교 밖 청소년에게 수당을 지원한다고 하니까 '탈선을 부추긴다'며 반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 2019년 3월에 〈프레시안〉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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